📘 [수기] 꺼지지 않는 내 영혼의 불꽃이여

발표년도: 1983
발표지: 건강생활
발표호수: 5
메모: -

[수기] 꺼지지 않는 내 영혼의 불꽃이여

뇌졸중으로 한쪽 몸을 못 쓰고 들어앉은 지 삼 년째.
생각하면 1981년 2월 9일은 나에게 불길하고 불운하고 불행한 복마전이 도사린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왼쪽 손발이 말을 안 듣고 걸을 수가 없었다.
내자가 없는 집이라 아이들이 경황 없이 이 병원 저 의원한테 보이다가 은사 황순원(黃順元) 님의 연락을 받고 경희대학 조영식 박사님의 배려로 경희의료원 한방과에 입원 치료하게 되었다.

내가 의식을 회복한 것은 입원한 지 일주일 정도 지나셔서였을까, 정신이 들어 보니 병원이었고, 내 옆에 종형이 앉아 있었다.
아이들에게 들어보니 그 날 곧 2월 9일 날 아침 애들이 일어나 내 방 문을 여니까 문이 잠겨져 안 열리더라고 했다.
나는 그것부터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평소 방문을 잠그지도 않고 잠가야 할 일도 없었는데 왜 잠겨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애들이 문을 따고 들어와 보니 내가 가만히 누운 채로 있더라는 것이다.

의식이 회복되어 생각해 보니 필경 호되게 맞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어코 고혈압이 덮쳤구나 싶었다. 나는 원래 몸이 비대한 편인데 30대 중반부터 혈압이 높았다.
적어도 그때부터 혈압이 높다는 것을 알았다. 그 뒤 자주 병원에 다니면서 혈압을 재보고 의사들과 상의를 해 보았으나 병을 치유할 만한 뾰쪽한 방도가 없었다.
기껏 체중을 줄이는 것과 상식적인 식이요법 밖에 약물 치료법은 거의 없었다.
그런대로 본시 먹어온 것이라 술, 담배를 끊지 못하고 육식도 잘했다.
정녕 해로운 것을 알면서도 간간이 먹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발병 원인(遠因)에 지나지 않고 직접적인 근인(近因)은 전날의 갑작스런 운동이었다.
본래 운동과는 취미가 없는 내가 운동의 절실함을 깨닫고 이제부터라도 시작해야겠구나 하고 전날 우리 작은 아이와 같이 시장에 가서 생전 만져보지도 않은 트레이닝 한 벌을 사고 운동화도 한 켤레를 샀다.
그걸 들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우연히 한번 뛰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 신길동 국민은행 앞을 조금 지나서 집에까지 약 200미터를 달려서 왔다.
그뿐 이날은 술도 안 먹고 따로 충격 받은 일도 없었다.
한데 갑자기 뛰는 바람에 혈압이 상승하였던가 보다.
약이 되고자 운동을 시작한 것이 도리어 병을 초래하였으니 이건 신의 장난이 아닐 수 없다.
그랬건 저랬건 한 번 엎질러진 물을 어쩔 수 없듯이 닥친 불운을 더 왈가왈부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누워서 죽을 받아 먹은 것이 한 달, 그동안 날마다 침을 맞고 달인 한약을 먹고 환약, 양약을 먹으면서 차츰 혈압이 조절되고 기운도 조금씩 생겼다.
그 가운데서도 나는 주책 없이 술 생각이 나고 마음속으로 곧 일어나 걸을 것 같았다.
그래 간병하러 오는 사람에게마다 주책없이 술을 딱 한 잔만 갖다 줘 보라고 하고 신발도 갖다 한 번 신겨 달라고 했다.
그러나 신을 갖다 신겨 준 사람은 아무도 없고 술을 갖다 주는 사람은 더구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와 같은 입원 치료 중에 가장 아쉽고 간절한 것은 내자였다.
천생 내자가 없는 몸이어서 인근에 사는 사촌 종형과 출가한 제매와 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이 하루씩 번갈아 다니면서 간병을 했다.
종형은 상업에, 제매는 가사에, 아이들은 학업에 모두 매인 몸들인데 미안하고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거기다 집도 또 맡길 사람이 없어서 출가한 딸이 와서 제 동생들 밥 빨래를 해 주면서 살림을 맡았다.
아픈 몸에 신경이 쓰이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것을 참고 견딜 수 밖에 없었다.
미안한 생각도 불안한 마음도, 걷고 싶은 욕심도, 먹고 싶은 음식도 모조리 참을 수밖에 없었다.
신약선서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사랑의 장(章)’을 되새기면서 꾹꾹 참았다.
거기에 보면 사랑은 첫째, 오래 참으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했다. 모든 것을 오래 참고 견디는 사랑과 믿음이 결집한 정신력 - 여기에 기대고 하루하루를 병의 치료라기보다 정신 수양으로 마음을 바꾸어 가는 동안 나는 앉아서 혼자 마른밥을 먹게끔 되었다.
그러다 마침내 휠체어를 타고 아래층으로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고 정원으로 바람을 쐬러 내려다녔다.
정원 풍경은 맑고 신선하기나 하였으나 나를 도리어 고독하게 하였다.
희고 빨간 소담스런 장미꽃이며 싱싱하고 새파란 잔디가 나를 소외하였다.
아름다운 자연과 더 이상 친근해질 수가 없고 즐길 수도 노래할 수도 없거니 하자 그것들에게서 도리어 배반이나 당한 것처럼 야속하고 원망스러웠다.
생명력이 약동하는 대자연과 병들어 시들어가는 나. 그러다 나를 소외하고 배반한 것은 진정 천연의 자연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서글픈 감회에 잠기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몸을 버린 환자의 값싼 감상은 아니었다.
지천명(知天命)을 지나서 이순(耳順)을 눈앞에 둔 나에게 인생을 마무리 짓는 수행은 있을 망정 감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리치료를 받기 시작한 지 십여일, 나는 어서 한 걸음이라도 걸어보고 싶었다.
그걸 담당의사는 더 있다 걸어보라고 말렸다. 그러나 나는 지팡이라도 집고 어서 내 힘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걸어보고 싶었다.
끝내 의사의 만류를 물리치고 지팡이를 신청했다. 한쪽으로 집는 외나무 지팡이였다.
그걸 짚고 처음으로 걸음을 한 걸음 떼어보았다. 왼발이 간신히 끌려 들렸다.
처음이라 그러려니 하면서 하루에 세 차례씩 복도를 갔다 왔다 하면서 다리 힘을 내려고 애썼다.
한데 아무리 그래도 다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땅에 닿을까 말까 하게 들리는 건지 끌리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거기다 왼손은 딱 오그라들어서 펴지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았다.
한 달이 가, 두 달이 가, 석 달, 넉 달이 다 가도 평상 고 모양이었다.
조금도 차도가 없었다.

이 정도 걸음 연습을 하는 외에는 할 일이 없는 나는 병상에서 종일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가끔 찾아오는 문병객하고나 한두 마디 인사를 나눌까 할 일이 없었다.
오라, 이 기회에 성경이나 많이 보아두자. 애들한테 집에서 보다 둔 성경을 가져오라고 하여 열심히 보았다.
전에도 두어 번 보았던 것인데 이런 병상 생활에서는 성서가 또 하나의 약이 되고 위안이 되고 수양도 되리라 싶어 그걸 부지런히 보았다.
한 번 읽고 두 번 읽고 세 번째는 붉은 줄까지 쳐가면서 보았다.
역시 성서의 진리와 깨우침은 무궁무진하고 마음의 양식이 되었다.

허나 나는 이것만으로는 만족하지가 않았다. 병도 차도가 없는데 밥이나 먹고 누웠다 앉았다 하는 게 너무 너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밥벌레밖에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오라,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 본연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머리 ‘두뇌 작용’은 이상이 없는가 시험하기 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한데 다행하게도 문장이 제대로 맞아 떨어졌다. 앞뒤 연결이 맞고 사건도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이리하여 퇴원을 앞두고 두 달 동안에 세 편의 단편을 썼다.
‘병부(病父)와 형제(兄弟)’, ‘효부(孝婦)’, ‘간병인(看病人)’ 등이 그것이다. 다행히 머리는 좋고 오른쪽 손발은 이상이 없어서 이같이 쓸 수가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은 이를 두고 일컬은 말이 아닌가 싶었다.
몸을 못 쓰는 위에 내 천부(天賦)이자 천직(天職)인 글마저 쓸 수 없게 되었으면 내 인생은 완전히 종지부를 찍었어야 했을 것이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너무너무 기특하고 다행하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점 하느님의 뜨거운 은혜라고 믿고 뜨겁게 감사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입원 치료한 지 반년이 지나도 왼쪽 손발은 조금도 낳는 기미가 없었다.
처음 걸음 연습을 시작할 때 꼭 그대로이고 손도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럴 바에야 공연히 병원 신세만 지고 더 있을 필요가 뭐 있겠는가 싶어 나는 드디어 퇴원을 결심하고 동년 8월 25일 병원을 뒤로 하였다.
그동안 거액의 입원 치료비를 완전 무료로 해 주신 조영식 박사님과 수시로 병원을 찾아주신 친지, 간병에 수고했던 내 두 아이, 종형과 제매에게 감사를 드리고 고마움을 보낸다.

반여년 만에 한쪽 몸을 버리고 돌아온 나를 나의 초가누옥은 눈물로 반겼고, 내 방에는 이미 자식들이 준비한 침대와 테이블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동이 불편한 몸에는 아무래도 침대생활이 더 편하고, 그런 가운데도 나는 변함없이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비록 병원에서 목숨을 건지고 퇴원을 했지만 나의 투병 생활은 짜증, 이때부터 시작된 셈이었다.
집에서도 끝까지 치병을 위해서 노력은 계속해야 하고 대학에 다니는 두 아이를 끝까지 가르치고 뒷바라지를 해줘야 하기 때문이었다.
내자가 없는 데다 적은 수입이나마 내 글 쓰는 수입 외에는 누구 한 사람 생활비, 학비를 도울 사람이 없는 것이었다.
난감한 일이었지만 두루 내 운명이자 소명이거니 하고 이에 전심 전력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부터 즉시 그동안의 일기 정리를 하고 새 작품을 구상하는 한편, 다시 치료 방법에 마음을 쓰기 시작했다. 비록 우리나라에서 한방으로 가장 권위 있는 병원에서 반 년 동안이나 치료를 받았지만 그래도 완치할 수는 없었다.
행여나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아서 한방 의원에게 더 보여 보기로 하였다.
병이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큰 돈, 큰 힘을 들여서 큰 데서는 못 나은 것이 하찮은 데서 뜻밖의 효험을 보는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 먼저 나는 전에 겪어본 적이 있는 강남서 사는 김 모 의원에게 연락을 해서 왕진을 의뢰했다.
한방 계통의 의원인데 이 방면에 능통해서 침을 잘 놓고 물리치료까지 하기 때문이었다.
과연 이분이 가깝잖은 거리를 날마다 와서 정성스레 침을 주고 뒤에는 뜸까지 떠주었다.
그러나 이게 한 달 남짓을 해도 효험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이건 역시 난치의 병이구나 싶어 그만 뒀다.

하루는 뜻밖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시골 의원한테서 느닷없이 편지가 날아왔다.
나주 금천면에서 온 것인데 내용인 즉 내 병 소식을 모 지상을 통해서 보았다면서 치료 방법까지 대충 설명하고 한 달 안팎이면 낫게 해주겠다고 급히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거기다 치료는 또 무료로 해주겠다고 하였다.

이 편지를 받고 나는 오랫동안 병상에 있으니까 별 사람도 다 있거니 하는 한편, 역시 약한 환자의 마음으로 혹시나 하는 호기심이 없지 않는데 급기야 두 번째 편지가 날아왔다. 어서 오라는, 꼭 오라는 요지였다.

나는 이 사람이 병을 잘 낳게 하는 의원 같으면 그런 시골에 묻혀 있지가 않겠지… 또 횡령스런 풍쟁이가 아닐는지도 모른다 싶으면서도 은연중 마음이 끌렸다.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도 혹 연분이 닿으면 어떨지 모르겠다는 사행심에서였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운신을 못하는 몸으로 도저히 갈 엄두를 낼 수가 없고 설혹 간다 치드래도 왕복 택시를 대절할 수밖에 없는데 교통비며 체제비며 많은 돈이 들 것 같았다.
거기다 치료를 무료로 해 주겠다고 했지만 그도 그저 알 수는 없는 일인데다 또 내 수발을 해줄 사람이 따라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집에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학교 다니는 두 아이와 부엌 시중을 드는 딸애 밖에 없으니 갈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몇 달 전부터 내 간병을 해주겠다고 집에 와 있는 이모여인(李某女人)이 있어서 그 사람과 함께 내려가기로 작정하였다.
모든게 허사가 되고 말지라도 마지막 기회이니 소원이 나 없게 치료를 받아보리라 하였다.

불편한 몸이지만 오랜만에 나선 여행길은 모든 게 새롭고 신선하였다.
아침 여덟 시에 택시로 서울을 떠나 호남 고속도로를 달리기 여덟 시간 광주를 거쳐서 금천으로 가자 편지를 보낸 예의 한의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시골 한방이라 입원실 따위가 있을리 없고, 면소 여관에서도 시설이며 식음이며 거기가 불편할 것 같아서 의원이 읍에까지 왕진을 다니기로 하고 우리는 의원을 함께 태우고 나주 대지장(大地莊)으로 들어가 여장을 풀었다.

자리에 앉자 여독을 볼 사이도 없이 의원은 문진을 하고 우유병에 담아온 달인 한약을 먹인 다음 자기 특유의 침술을 발휘했다.
반듯이 뉘어놓고 머리에 배에 침을 하나씩 꽂더니 각 손가락 끝과 발가락 끝에 양쪽으로 침을 주었다.
바로 손톱 옆, 발톱 옆에 주는데 몹시 아프고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러고 돌아간 이후로는 다음 날부터 아침 저녁으로 두 번씩 날마다 정성스레 약을 달여 가지고 와서 같은 방식으로 침을 놔주고 갔다.
가깝지 않은 거리를 때로는 눈까지 무릅쓰고 다니면서 정성스레 보아 주었다.
그러나 이도 그 사람의 장담이었을 뿐 한 달 가까이 치료를 받아도 발가락 하나 까닥 하지 않았다.

머나먼 시골까지 많은 돈을 들이고 가서 의원도 나도 시중 드는 사람도 많은 정성을 기울였지만 이도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내 병의 치료는 더 이상 손을 써 볼 수 없는 한계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았다.

비록 치료는 포기하였지만, 집에서 요양은 게을리 할 수 없는 일이어서 나는 그동안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에 주력하고 있다. 정신 수양과 운동과 식생활이 그것이다.

첫째, 정신 수양 면에 있어서는 성서를 비롯해서 동양의 경전, 그 밖 수양 서적을 끊임없이 보는 한편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하고 있다.
그 보배로운 성경의 가르치심을 마음 구석구석에 새기고 무궁무진한 진리와 지혜, 그리고 주로 시 ‘시경’을 접하고 있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온 주위가 은혜로 가득 찬 것 같다.
그리고 삶과 죽음까지 초월한 느낌이다. 몸을 못쓰고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나 같은 지병의 고질환자에게는 이 같은 정신 수양과 마음의 준비가 육신의 치료 이상으로 긴요한 것이 아닐까. 더구나 하느님과 끊임없는 대화는 좋은 위안이 되지 않을까.

다음으론 운동이라고 하였지만 한쪽 몸을 못 쓰는 사람이 운동이래야 무슨 운동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최소한도는 움직여야 하는 것이라 아침에 눈을 뜨면 먼저 간단한 팔다리 운동부터 한다.
침대에 누운채 오른손으로 왼손을 부축하고 ‘팔 들어올리기’부터 시작하여 ‘팔 굽히기’, ‘손가락 펴기’, ‘다리 들기’ 같은 것을 약 이십 분간 하고 일어나 앉아서 ‘목 운동’, ‘어깨 펴기’ 등을 또 좀 한 다음 밖으로 나가서 ‘걷기 운동’을 한다.
지팽이를 짚고 집 앞 골목이나 뒤안길을 두어 번 갔다 왔다 하는 것이 고작이지만 이것이 나의 가장 크고 많은 운동에 속한다.
그리고 돌아와서 마루에 걸터 앉아 아이들이 떠다 준 물로 혼자 한 손으로 세수를 하고 들어온다.
다음엔 아침 식사를 하고 요즘 시간으로 아홉 시면 테이블 앞에 앉는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까지 꼬박 글을 쓴다. 이 동안에도 차례 없이 누웠다 일어났다 하므로 전신운동이 많이 된다.

다섯 시까지 집필을 끝내고 신문을 보다가 밤에는 순전 텔레비전과 동무를 한다.

계속 텔레비전을 켜놓고 있으면 어느덧 열 시가 넘고 잘 시간이 된다.
그러니까 나가서 세상의 풍물을 못 접하는 대신 앉아서 화면으로 세상 구경을 하고 사는 셈이다. 이러고 누워서 기도를 하고 있으면 하느님이 저 나라로 데려다 푹 재워준다.

다음은 식생활인데 이건 아주 간소하고 담백하다.
겨울에는 반드시 그렇지도 않지만 날씨가 풀리면서부터는 아침은 마아가린에 군 엷은 식빵 두 조각에 우유 한 컵, 점심은 호배추와 과일을 혼합한 사라다 한 접시, 그리고 저녁은 작은 공기로 밥 한 공기다.
그것뿐이다. 그리고 딴 간식 같은 것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체중을 줄인답시고 아픈 몸에 너무 안 먹고 온종일 책상 앞에만 앉아 있으면 힘이 빠지고 빈혈이 생길 것 같아서 가끔 고기는 조금씩 먹는다.
그리고 피로하거나 적적한 때는 술, 담배도 조금씩은 한다.
술, 담배는 금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완전히 끊지를 못하고 있다.
이젠 나의 쾌유를 염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죄송하고 미안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병상의 몸, 고독하고 고달픈 세상이라 어쩔 수 없이 조금씩 한다.

이런 가운데도 한 가지 다행한 것이 있다면 한쪽을 못 쓰고 들어앉은 몸으로 글을 꾸준히 많이 써서 적으나마 그 수입으로 생활을 지탱하고 두 아들을 대학까지 가르친 점이다.
큰 아이는 올해 항공 대학을 마치고 곧 취업이 되어서 부산에 내려가 있고, 작은 아이는 서울대 법대 3학년에 재학 중인데 작년에 1차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목하 2차 본고시 준비에 여념이 없다.
오로지 나에게 이와 같은 은혜와 축복을 주신 하느님과 나의 쾌유를 영원하시는 만사람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릴 뿐이다.

도림혁옥(道林革屋)에서.

📝 2차 저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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