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역의 산장
이역의 산장 제1장
2024.08.12 월 오전 2:28 ・ 32분 40초
김병한
눈보라가 휘말리는 황토산이었다. 핫바지 바람에 머리를 흩날리며 저편 고개에서 달려오는 노인이 있었다.
골짝으로만 골짝으로만 내닫는 노인의 몸짓은 그게 얼핏 사람이 아니라 토끼가 껑충거리는 듯한 몸가짐이었다.
손에 잡힐 것이라곤 잔디 하나가 없는 황토산에서 수없이 넘어지며 달려오는 탓이리라.
그 노인의 손에 낯이 들려 있고 발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노인의 발자국이 놓인 때마다 금방금방 엉기는 핏방울이 흰 눈 속에 빨간 꽃잎을 뿌린 듯 선연하였다.
그리고 눈보라에 휩쓸려 아련히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사람 살리소오."
그게 세찬 눈보라 속에서 굉장히 힘을 뽑아 부르짓는 외마디소리일 것이었다.
방금 총소리가 연달아 울렸던 까닭에서리라.
어느새 노인이 아래의 골짜기에까지 왔다고 느꼈다.
문득 얼음장이 깔린 개울에 앞이 막혔다. 퍼석 엷은 얼음장 깨지는 소리가 가벼운 음향을 그으며 물살 속에 젖어들었다.
잠시 후 개울을 건넌 노인은 그대로 논을 가로질렀다.
그리 높지 않은 논을 격한 저편 기슭에 조그만 초가가 한 가우(假寓) 어지러운 눈발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에이 고얀 놈들!"
집 앞에까지 다다른 노인이 거의 본능적으로 낫을 팽개치고 대문을 두들기다가 까무러쳐버렸다.
한참 만에 이 집 여인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나이 마흔 살쯤 나보이는, 허리가 후릿한 여인이었다.
여인의 휘둥그려 안 눈이 자못 겁내 하는 표정이었다.
대문을 열지 않고 거기 단 밑에 있는 확 위에 올라서서 조심스레 대문길을 살폈다.
그리고는 가만히 내려서서 대문 앞으로 가 빗장을 뽑았다.
분명 좀 전에 총소리에 놀라서 쫓겨온 사람이리라.
여인이 노인을 사랑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피 흐르는 곳부터 보았다.
그새 산지 피가 엉겨서 까맣게 굳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처만은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다. 타나이 발 뒤꿈치와 멋은 것이다.
피를 대강 씻고 우선 소금으로 뜯어다 소복이 쌓아주었다.
누구든 간에 우선 살려놓고 봐야 할 일 같았다. 이불을 갖다 얼마든지 씌워줬다.
그리고 우선 미음이라도 한 그릇 끓이려는데 나무가 없는 것이다.
어저께 닭장을 부어서 떼고 남은 넓 반지가 몇 조각 남았을 뿐이었다.
이거 나마 아끼지 않고는 안 되는 것이었다. 광으로 왔다.
녹두와 메미를 한 사발 가량 냈다. 오랫동안 불을 넣지 못한 사랑채의 솥이 빨갛게 녹슬어 있는 것이다.
이웃고 불을 지핀 여인이 손에 간다랗게 떨렸다. 또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쿵쿵 쿵쿵 쿵쿵 땅 따르 아련히 울려오는 총소리가 차차 가까이 들려왔다.
여인은 그만 아궁이 어플을 발로 으깨버리고 쏜살같이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노인의 이불 위에 무명소유를 갔다. 허얗게 덮씌웠다.
그리고 신을 아궁이에 넣어버린 다음 안 채로 달려왔다.
가슴이 산발같이 떨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눈을 갖다 창구멍이 되고 압산을 보았다.
붉은 띠를 띄고 왼편 골짝으로 새까맣게 달아나는 한 때의 산 사람들을 향해 이쪽 봉우리에서 간단 없는 총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좀 뒤에서는 서너 시씩 둘러싼 두 표의 사람들이 연달아 총소리를 울리고 있었다.
봉우리에는 태극기가 팔락거리고 있고 정말 경찰이 들어왔는가 보다.
그래서 지금 산 사람들을 쫓고 있는 것이라 여인은 자기도 모를 눈물이 주르룩 뺨을 타고 흘렀다.
그와 함께 죽은 아들의 피 어린 얼굴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웬 사람들이 이렇게 나무 한 그루가 없는 민둥산으로 쫓겨온 것일까 그러고 보니 알만하다.
필경 강진경찰서와 장흥 경찰서에서 합작해 가지고 모으는 것이리라.
붉은 띠를 뛴 사람들이 그새 봉우리개까지 올라갔다고 느꼈다.
그새 수가 반은 줄어 있었다. 그리고 군데군데 쓰러진 시체 옆에는 빨간 피가 눈을 녹이며 있었다.
쿵쿵 땅 따르를 그러더니야 산 사람들이 아주 고개를 넘어 수자 총 소리는 그대로 맞고 말았다.
이현에서 정지를 하던 모자의 허연 태를 두른 사람 한 사람이 아래 골짝을 타고 내려왔다.
연애 이쪽을 건너다 보는 폼이 분명 자기 집을 목격하고 오는 것 같았다.
여인은 그만 깜짝 일어서서 항아리 속으로 가 숨어버렸다.
다시금 가슴이 산발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무릎의 치마도 달달 떨렸다.
그런 여인은 죽음에 대한 불안과는 다른 또 하나의 두려움이 마음을 태우는 것이다.
만일 몸을 망친다면 지난번 인민군이 들어올 때 여인은 9살에게 몸을 맡겼던 것이다.
그리고 단지 하나이던 아들이 죽고 남편이 붙잡혀 간 것도 이 때문이었다.
여인은 그때 놀란 가슴이 아직도 완전히 안정되지 않았다.
살도 먹먹하였다. 여인은 거의 본능적으로 손을 가져다 삿을 가리며 와들와들 떨었다.
그리고 가슴을 저이며 있는 때였다. 문득 가다랗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저 건너 집에 태극기 꽂아라. 잠시 후 다시 경찰이다.
저 건너 집에 태극기 꽂아라. 필시 개울에 막혀서 못 오고 거기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 싫어
순간 여인의 얼굴에 화색이 들었다. 어느새 이마에는 진땀이 배어 있었다.
항아리 속에서 나온 여인은 그러나 선뜻 나가지를 못했다.
다시 장국에 눈을 대고 바깥을 살폈다. 태극기가 거치고 경찰이 가볍다.
여인이 태극기를 찾아 들고 막 밖으로 나오는 때였다.
또 한 사내가 이젠 동편 고개에서 머리를 흩날리며 이리로 내달려오는 것이다.
서른 남짓한 장년 산으로서 흰 핫바지, 검정 조끼를 걸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산에는 웬 다름질이 또 저렇게 날센 것일까 허얀 눈발 속에서 검정 헝겁 조각만이 날아오듯 산내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뒹구는 법 한 번 없이 잘도 아래 골짜기까지 내려왔는가 하자 펑 거울로 뛰어들었다.
얇은 얼음장 깨지는 소리가 먼저 본 노인이 건널 때보다 한결 요란스러운 음향을 그으며 물살 속에 젖어들었다.
어느새 사내가 물속에서 나왔다. 그리고 금세 눈을 가로 질렀는가 하자 주인, 문 좀 여시오.
여인이 이미 가구가 있었던 듯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와 냉큼 빗장을 뻗다 나 좀 감춰주시오 아주머니.
그런 사내의 입가에 계거품이 개어 있고 턱이 반나마 처져 있었다.
사내는 거의 쓰러질 듯한 머리를 갖다 여인의 어깨에 기대며 어서 좀 감춰주시오.
그런 가운데서도 사내는 귀엽고 뒷선 비타를 한 번 돌아봤다.
행여 자기를 쫓은 사람이 그새 3미터에나 나타나지 않았나 하고 여인이 무심코 사내의 발을 내려다봤다.
눈에 묻힌 발이 신을 거꾸로 돌려 신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내의 발자국은 펑펑 날리는 눈으로 해 그의 자취가 없어지며 있었다.
여인이 잠자고 손을 뒤로 돌려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면서 뒷들로 돌아갔다.
사내가 따라가자 애인은 바로 굴뚝 옆 항아리 앞으로 가서 가운데 항아리 하나를 틀어 옮겼다.
항아리 밑에 또 하나의 항아리가 있는 것이다. 그 놈은 땅에 묻혀 있었다.
이전 인민군이 들어올 몸을 망치고 나서 들어가 있던 항아리였다.
사내가
곧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자 여인은 이 항아리를 다시 제자리에 옮겨놓고 방금 자기들이 돌아온 발자국을 보았다.
발자국은 여전히 펑펑 날리는 눈에도 배인의 자취가 없어지며 있었다.
여인이 광 뒷문으로 해 방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었다.
어느새 누른 복장을 한 두 사례가 대문으로 들어서면서 사람 안 왔느냐는 것이다.
여인은 냉큼 태극기부터 구여서 품 속에 넣고 마루로 나섰다.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장총을 들고 한 사람은 죽창을 들고 있었다.
온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인의 대답 같은 거 아예 들을 생각도 아닌 듯 방으로 썩 들어와서 광을 더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런 말들을 하였다. 여하튼 당내 숙청부터 먼저 할 걸 우리 실책이야 글쎄 그런 놈을 숙청 안고 두니까 이런 사태 속에서 빠져나가지 않아.
그래도 머음을 산 놈이라서 사상이 좀 확고한 줄 알았더니 그 모양 아니냐
그리고 그들은 광을 나와 부엌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부엌에서 웅크리고 자던 늙은 수케가 왕왕 달게 들 듯 찢어댔다.
이때껏 총소리가 울려도 죽은 시중만 하고 있다. 비로소 산업계에 으렁 되는 것이다.
부엌에는 단지 살각 밑에 물동이가 하나 있을 뿐 달리 의심갈 만한 곳이 없었다.
그들이 사랑처로 갔다. 순간 여인은 가슴이 두고 나 있다.
거기 있는 노인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죽창을 든 사내가 문을 잡혔다.
그리고 이렇게 덮어놓는 무명 소리를 푹 찌르며 이게 뭐야 노인이 아야야 하고 가냐는 비명을 울렸다.
그러자 총을 맨 사내가 들어가 이불을 제끼며 이게 누구야 여인이 태현이 저의 아버지 올시다.
늙은 아버지가 왜 방금 날아오는 총알에 발을 상했습니다.
정말 그들은 여인을 이 아래로 훑어보다가 한참 만에야 방을 나와 뒤틀로 돌아갔다.
여인은 되도록 대안하려 하였다. 이미 항아리 속의 산에는 자신의 천명에 막힌 것이다.
존만의 절그럽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여인은 다시금 죽은 아들의 피어린 얼굴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철그럭 철그럭 이웃 새 항아리가 다 깨지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 가여 그들이 앞으로 돌아나왔다. 총을 맨 사례가 대문을 나서며 아무튼 시기는 늦었어 그럼 어서 빨리 가자고 한 머리 싸움이 지나간 산골짝은 여기저기 시치하니 어지러이 널려 있고 그 위에는 흰눈이 여전히 내려 덮고 있었다.
노인과 함께 사랑에서 잔 젊은 사내가 이튿날 아침 여인께 눈이 사의를 표하면서 가야겠다고 했다.
집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여인이 그러고 말고냐 하면서 어서 돌아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노인만은 선뜻 떠날 기색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갓 발을 다친 데서만은 아닌 듯 했다.
돌아갈 곳이 막연해서인 듯했다. 너희는 이불을 안만 들어도 몸이 자꾸만 떨렸다.
발 뒤꿈치도 사뭇 따끔거렸다. 잇목으로 기어가 무명소기를 끌어다 발치를 쐈다.
그래도 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불이나 좀 넣어줬으면. 그런데 여인이 들어와서 발 상한 데를 좀 보자고 했다.
그러고 까만 고약 같은 걸 주면서 무슨 곰 쓸개니까 잠깐 붙여둬 보라는 것이다.
이전 자기 남편이 나무를 하다가 발을 상해가지고 쓰던 남저지이라고 하였다.
약이 살에 닿자 맞아 상처가 더 따끔거리고 더 아려웠다.
노인은 두 손을 가져다 발목을 졸였다. 그럼으로 해서 아픈 감각을 덜 느끼려는 듯이 그러다가 미안하지만 방에 불 좀 떼 주시오.
여인이 난처한 듯 노인의 해스간 얼굴을 보며 금매 말이오 나음만 있으면 떼 드리면 좋겠소만.
그리고 아랫목에 손을 넣어 보았다. 여태껏 이불을 깔아놓은 때문일까 방이 거의 선뜻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노인은 이제도 무릎을 덜덜 떨며 이렇게 떨려서 노인은 꼭 이 방이 치워서 만이 그런 것은 아닌 듯 했다.
상처로 인한 오한이 찬 기운을 더하게 할 듯 하였다.
근데 말이오 나무만 있다면
이곳은 비교적 산이 험악한 남도 지방이지만 나무 사정이 좀 달랐다.
잔디 하나가 없는 순흥매인 것이다. 어느 쪽으로든지 20미를 나간 곳에 비로소 마을이 있고 나무가 있었다.
그것도 나무와는 동국방으로 나가야 했다. 서남은 붉은 흙매를 넘고 넘어간 저편에 아득한 들만이 끝없이 펼쳐 있는 것이다.
하필이면 이런 곳에 집이 안 가고 있는 있게 된 것은 그래도 골짜기 있는 몇 대기의 전답을 의지하는 대서인지 몰랐다.
나 엄마는 해마다 흉작인 해는 별 수 없이 나무 하는 해마다 전답에서 나오는 집보다 집, 보리대, 콩대 같은 걸로 이어됐다.
그것도 흉제에게는 별 수 없이 동구로 이십미를 나가서 해다 떼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올해는 난리로 통이 농사를 못 가꾼 데다 어쨌지 거두어들이 집단마저 산 사람들이 오며 가며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난리도 난리지만 홀로 연이는 눈 구멍 길을 20이나 가서 나무를 해올 수가 없었다.
불가 단말을 싼 마음이며 궤짝 같은 걸 뜯어서 떼고 마지막 닭의장까지 부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밥도 단지 아침에 불 한 번을 떼 가지고 새 기것을 다 지었다.
우선 이렇게라도 죽지 않고 사는 것만이 다행이라 여겼다.
예 인내는 인민군이 들어와 가지고 사흘이 지난 뒤에까지도 인민군이 왔다는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남자가 저장에 나갔어야 비로소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여인이 몸을 망치고 식구를 잃은 것도 역시 이날 밤이었다.
이곳이 이렇듯 세상 소식이 뜬 것은 이 집이 면 행정에서 전혀 도외시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십리 밖에 마을이 있는 이 골짝은 본래 지역상으로는 상면 학원리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이 집만은 또 본래부터 번지도 없고 돼지 새도 없는 집이었다.
이 집 한 집을 보고 이 심리 골짜기까지 조사해 가는 관리도 없고 연락해 주는 구장 반장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젊었을 적에 이 집을 마련한 이 집 남자 역시 그런 문서적인 것에는 흥미가 없는 이인이었다.
그저 일하고 먹는 것만을 귀하게 길 뿐 그런 집문사나 호적 같은 것은 또 있어서 못 하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도민증도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 해서 또 아쉬울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전답을 갖고는 한편 장날이면 겨우 저자에나 나가서 명태 말리나 사가지고 오는 게 고작 인 때문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속도 역시 그 저자에나 나가서 알 도리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을 그들은 그걸로써 만족했던 것이다.
노이는 거 후 사흘 동안을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아침에 더운 밥 한 수를 먹으면 낮과 저녁은 그대로 냉반이었다.
반찬은 겨우 갓물로 숨을 죽였을 뿐인 새까만 배추 김치와 고치 조림과 간장 뿐이었다.
어쩌지 몸을 일으키고 문을 열어보았다. 선뜻 찬 바람이 몸에 우와히 감겼다.
오늘 따라 바깥 날씨는 한껏 푹하고 거드름이 방울방울 놓고 있는데도 이내 문을 들어 떠쳐버렸다.
장구멍 사이로 절로 들어 비치는 바깥 사람 그림자가 있었다.
여인이었다. 그새 눈이 녹고 차차 마르며 있는 마당 가운데서 무슨 풀을 먹이고 있었다.
그리고 여인의 뒤에는 늙은 수케가 앞다리에 턱을 괴고 느물느물 여인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추운디 그만 들어가거라. 잠시 후 여인이 개에게 말하자 걔는 코 기지개를 한 번 크게 켜고 나서 어슬렁 어슬렁 부엌으로 들어갔다.
노이는 문득 창구멍에서 눈을 돌려 방바닥을 보았다.
바야으로 눈부신 햇살이 창구멍으로 새어 들어와 방바닥에 조그만 동그라미를 그렸다.
손을 갖다 거기에 데었다 따스했다. 그러다 노인은 다시 문을 열어 잡고 밖으로 나오면서 그 자식 하나 있는 것이 꼭 온수로 생겨났던 것이로구나 한숨과 함께 속으로 내거렸다.
노인이 짜장 이곳으로 내달아온 것은 빨치산이 식구들을 방에 가둬둔 채 집에 불을 질러 버린 때문이었다.
노인 아들 득새가 그 마을 좌익 우두머리로 있으면서 여당과 정을 맺고 지냈던 까닭에서였다.
밖으로 나온 노인은 열이 약간 내렸을 뿐인 발을 철쭉철축 뛰어 옮기면서 대문 길로 나갔다.
여인이 풀을 먹이다가 까만 눈을 이쪽으로 돌리며, 아니 추운 뒤 못 하러 나가느냐고 물었다.
너희는 대답이 없으니까 들어가시오. 그러나 너희는 아무 말 없이 대문에 의지하고 이 전날 자기가 달려오던 산비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힘이 적이나 하면 꼭 가서 식구들의 재 묻은 얼굴이라도 한 번 보았으면 싶은 것이다.
만일 그 재 묻은 얼굴이라도 보지 못하면 삐라도 한번 만져 봤으면, 뼈라도 한번 만져봤으면 싶은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더 이상 대물기에 서 있지 못했다. 눈부신 햇살을 보기가 저주스러운 것이다.
식구가 그렇듯 불타 죽은 마당에 무슨 나치를 들고 어디로 갈 것인가 싶었다.
노인은 차차 맥이 풀리자 그 자리에 덥썩 주저앉아 버렸다.
햇살이 노이는 눈꺼풀에 와 어지러이 스며들었다.
눈이 자꾸만 감겨들고 졌다. 어른 어른한
그림자들만이 어둠 속에서 더욱 어지러이 맴돌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데 무에 덥석 어깨에 부딪히면 노인 양반이 들어가시라 해도 여인이 와서 이렇게 했다.
노인이 희멀건 눈을 돌려 멍한 여인을 쳐다보았다.
어서 들어갑시다. 여인은 처음부터 이 노인의 곡절을 물리려 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의 곡절을 이야기 하지 않으려는 것과 같다.
그러면서 아무튼 이 노인이 여기를 떠나서는 갈 곳이 없는 사람이거니 하는 것만은 짐작이 갔다.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세상 소식이 그렇게 했던 골짜기에서 더욱 혼자 남겨진 여인은 선가 학계에 세상의 다른 눈치를 몰랐다.
오늘도 어쩌다가 자기 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한 사람 있어 그에게 물은 즉 경찰이 들어온 뒤로 차차 길도 틀리고 피난 간 사람들도 돌아온다고 여인은 오직 자식 잃고 남편 붙들려 간 것만을 슬퍼할 뿐 이 노인을 돕는 데는 딴 의심 같은 것이 있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온 노인은 다시 무명성이로 발찌를 싸고 이불을 들었다.
참 무자 상팔자라더니 놈이 꼭 원수로 생겨났던 것이 이로구나.
겨울 해가 서편에 기울었다고 느끼자 땅거미가 깃들이고 저녁 찬바람이 문풍기를 올렸다.
노인은 웅크린 몸을 더욱 웅크리고 이불 자락을 샅샅이 여미었다.
무엇보다 발 뛰고 치가 수시고 등이 실려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등을 갖다 슬며시 벽에 붙여보았다. 사람의 등과는 아예 달랐다.
바람 벽에서 내놓치는 찬 기우 많이 더욱 등을 시르게 할 뿐이었다.
사람이라도 한 사람이 있었으면 혼김이 턱없이 그리웠다.
마침 내 노인은 이불을 재끼고 일어났다. 밤발레그 부름 소리가 한결 자지러졌다.
밤벌레 울음소리가 자지러질수록 한층 더해가는 밤의 고여가 노인의 허허한 심해를 더욱 산란케 했다.
이 웃고 바지를 죽이고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달빛만이 횡행한 토담의 하얀 눈이 어지럽도록 눈부셨다.
그리고 간혹 반짝이는 눈 우모 소리가 초롱초롱 빛났다.
어디를 둘러봐도 검푸른 산봉우리 들만이 밤하늘을 아득히 도사리고 있을 뿐 한채는 죽음처럼 잠잠하다.
노인이 절축 절축 안방으로 건너갔다. 사람은 혼김도 혼김이지만 하루 한 차례씩이라도 불을 떼는 안방은 아무래도 덜 차고 포근할 것 같았다.
물함 없는 짓이긴 하지만 잠깐 입목에라도 앉아서 몸을 녹이라 하였다.
사실 손발이 마비되듯 얼어 굳은 노이는 지금의 몸을 따스로혔으면 하는 생각밖에 다른 염치 같은 것은 잊고 있었다.
봉당에 올라서서 가만히 오늘 일자 달빛이 잇목 농에 들이 비쳤다.
그뿐 달이 비치지 않은 것은 도리어 깜깜하였다. 문을 닫히고 들어와 가만히 방바닥을 짚어봤다.
사랑방보다 약간 훈훈하였다. 그러나 횡댕그렁한 기미는 다를 데 없었다.
역시 혼자 방이어서 그러는 모양이었다. 가만히 한 손으로 아랫목을 더듬어 봤다.
사람이 없었다. 이런 그리고 다시 방바닥을 두루 다듬어 봤으나 방바닥은 대자리만이 우틀두틀할 뿐 사람이 없는 것이다.
순간 노희는 워낙 무서운 생각이 들면서 머리끝이 곤두섰다.
몸을 가만히 돌이키고 다시 구석을 더듬거려 보다 선뜻 나무 조각 같은 게 만지였다.
물레였다. 그리고 옆에는 실 뭉치가 몇 개 궁그어 있을 뿐이었다.
노이는 가만히 일어서서 다시 벽을 더듬어 봤다. 병과 인도와 바가지 그리고 여인의 치마가 한 발 걸려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방금 여인의 치마가 잡힌 때만은 적이 마음이 따스로웠다.
여인이 분명히 있기는 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혹 뒷간이라도 가지 않았을까 그러나 여인은 뒷간에도 가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설마 광이나 부엌 같은 데서 잘 일는 없겠는데.
그러자 노인은 그만 자기도 모르는 새 방을 나와 사랑으로 건너고 말았다.
어두운 방에서 위에 쫓아 나오는 것과 같은 무서움을 느끼면서.
이튿 날 아침 여인이 어느 때처럼 밥상을 가지고 왔다.
역시 아침밥은 김이 무릎 끓이는 따순 밥이었다. 노인이 사람스에 여인을 그렇게 아름마한 얼굴을 바라보며 아니 저녁에는 어디서 주무셔 하고 말이 곧 나오래는 걸 꿀꺽 삼켰다.
간밤에 놀라고 궁금해하던 것을 생각하면 곧 묻고도 싶었으나 그대로 참은 것이다.
밥상을 들여놓은 여인이 상머리에 앉으며 그새 발은 좀 나으신 거라고 예 그저 그만하요.
어째 약은 자주 갖다 붙이지요 예 갈아 붙이고 마니라고 겨울 일어나서 그것이 그렇게 시 안 나은 것이요.
노희는 여인이 자꾸 말을 건네는 게 귀찮았다. 단지 하루 한 끼야 인 따순 밥을 따을 때 얼른 한 수라도 더 떠 넣어서 속을 풀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거듭 난리도 난리도 그렇게 한 날리는 처음 됐어요 처음 봤어요.
그러자 노인이 입은 이어 밥을 랭큼 삼키고 나 속이 떨려서 그런디 밥 좀 먹고 이야기합시다 아니 이불이 잠 왔는데 그렇게 춥습지요 나는 어저녁에도 별로 추운지 모르고 잤어.
순간 노희는 다시금 어쩌 이거 어디서 잤느냐고 물으려다가 역시 그만뒀다.
그리고 여인의 얼굴을 새삼 또 한 번 봐보았다. 눈동자가 까만 여인은 가루만 보는 40대의 여인 같지 않게 팽팽하였다.
그리고 어디라 없이 우수가 어린 표정에는 도리어 느긋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런 여인의 오른편 턱에 웬 흰 털이 한 홀 붙어 있었다.
노인이 얼핏 웬 털인가 해서 다시 한 번 쳐다보는 동안 털은 때마침 문통으로 새어드는 바람에 날려 상 옆으로 갖다 내다
해가 저물고 다시 밤이 엄습했다. 노인은 어젯밤 홍김과는 다른 또 하나의 호기심이 마음을 채웠다.
여인이 도대체 어디서 자는 자정이 가까울 지이에서 다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바깥은 여전히 푸른 달빛만이 휘엉청하게 받고 허얀 눈이 어지럽도록 눈부셨다.
봉당을 지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어젯밤 모양 방바닥을 더듬거려 보았다.
여인이 없었다. 가만히 무릎 걸음으로 다시 돌아가면서 벽을 더듬어 봤다.
그래도 여인은 없는 것이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어찌 된 사람이고 그러다가 노이는 문득 자기도 모르는 새 셋 문 부엌과 방 사이에 있는 새 문을 열어 보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봉문 틈새로 새어드는 달빛이 한 줄기 부뚜막에 비쳤다.
그리고 그 부뚜막이였다. 웬 사람들 둘이 이불을 들 쓰고 누워 있는 것이다.
노이는 두루 짐작이 갔다. 저래배도 한 사람 분명히 이고 또 한 사람은 분명 사람 아닌 개일 거라는 짐작이.
그러고 보니 아침에 애이 떻게
흰 털이 붙어 있는 것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노인은 한 편 얄미 없고 한 편 반가웠다.
하나는 여인이 아무리 쓸쓸하기로 서니 하필이면 기하고 함께 자는가 하는 반감이요, 다른 하나는 여인을 찾은 안심과 기쁨이었다.
잠시 후 노이는 사랑 바울과 이불을 걸어 안고 안방으로 돌아왔다.
이왕 비오들 바이야 자기가 이 방에서 자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너희는 밤이 한껏 깊은데도 좋은 음이 쉬어가지 않는다.
길을 걷다가 가만히 앉으면 벽에 기대고 부엌의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간열린 두 입김의 맞부딪치는 소리가 또렷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순간 노이는 야릇한 분노가 물겨졌다. 고요한 세상들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예스 부엌의 인기척을 잊으려고 하였으나, 신경은 자꾸만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문득 아픈 발 뒤꿈치를 만져봤다. 어느새 또 뿜뿜 뚱뚱 부어 있었다.
날새 다시 굶긴 모양이었다.
어서 이 상처가 나왔으면 좋겠다. 어서 나와 가지고 저놈 개라도 때려잡아서 소복을 좀 했으면 좋겠다.
그러자 너희는 또 죽은 식구들 얼굴이 어지러이 떠올렸다.
어느 날, 개울가에서 그슬려 죽은 기들 모양 새까맣게 타 죽었을 얼굴들이 힘이 자기나 하면 지금이라도 곧 쫓아가서 잿더미가 된 집이라도 한번 보았으면 싶었다.
그러나 너희는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자기는 이 세상에 영원히 얼굴을 내놓을 수 없는 죄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그리고 자자 굳이 잠을 청하였으나 졸리지가 않았다.
부엌의 인기척이 자꾸만 신경이 거슬리는 것이다.
사실 부엌에서는 무슨 소리 하나 들릴 일이 없는데도 가만히 일어나서 창궁으로 부엌을 내다 봤다.
부엌문 틈새로 새어드는 달빛이 한 줄기 부뚜막을 비쳤다.
그 위에서 여전히 여인과 개가 자고 있는 것이다. 노인은 브렌드 쫓아가서 개를 걷어차 버리고 싶었다.
여인도 떼밀어 버리고 싶었다.
순 고얀 것들 같으니라고. 너희는 사랑방에서 자고 난 때보다 몸이 훨씬 가벼웠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밤도 마음 방으로 가자.
새로운 노트
2024.08.12 월 오후 9:57 ・ 28분 32초
김병한
오유권 이역의산장 제2장 여인이 나무를 장만하였다.
봉당의 마룻장과 광에 있는 헌 농을 부순 것이다. 힘이 겨우 더라도 웬만하면 나무를 좀 하러 가봤으면 하는 것이나, 여인으로서는 이십리기를 가서 도저히 해 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말이 이 심리지 이심리만 가서는 또 곧 나무를 해올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인가가 가까운 곳은 모조리 근처 마을 사람들이 해에다 떼고 거기서도 다시 오리를 더 나가야 했다.
눈구멍도 눈 구멍이지만 짧은 겨울 해에 왕복 오십리를 걸어서 나무를 해온다는 것은 도저히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이전에 자기 남편만 하더라도 아침을 일찍 먹고 급하게 나서도 해가 다 저물어서야 돌아오던 것이었다.
그러고도 겨우 두 끼나 세 끼 때 나무밖에 못 해오던 것이었다.
농짝을 부순 여인은 몹시 서운하했다. 우지끈 우지끈 부서지는 농소리가 마치 어느 몸 한쪽이라도 부서지는 소리 같았다.
비록 헐고 케케 묵었을 망정 밤마다 남편과 함께 닫고 윤을 내던 농인 것이었다.
여인은 불현듯 노인을 도우는 것이 뉘우쳐졌다. 당신의 밥까지 짓노라고 나무가 얼마나 더 드는지 아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올데갈데 없는 노인에게 차마 모진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다만 이번에 부순 나무로서는 한 20알 남짓 될 수 있다는 것과 그 뒤에는 어찌해야 하느냐는 걱정이 있을 뿐이었다.
이젠 정말 불 뗄 것이라고 늘 반지 하나가 없는 것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질그릇이 아니면 사기 그릇, 사기 그릇이 아니면 새것만이 횡댕그렁하게 놓여 있었다.
그러고도 오히려 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대문과 장롱과 헌 솜이 들어 있는 광주이며 바구니 뿐이었다.
예인이 이날부터 밥을 저녁에 지었다. 아침에 짓던 밥을 저녁에 지은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는 저녁에 불을 떼서 새끼 밥을 다 지으려는가 보군.
노이는 은밀한 기대가 마음을 채웠다. 아침에 밥을 지을 때보다 방이 워낙 낮을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게다 모처럼 저녁까지 다 순밥을 먹은 노인은 오랜만에 밥을 먹은 속 같았다.
비로소 땀이 후터분하게 나고 삭신이 풀리는 것이다.
그러자 끄르르르 트림을 하며 슬며시 배를 쓰다듬어 보았다.
우글쭈글한 배 가죽이 적이 불루가였다. 그럴수록 슬슬 배를 쓰다듬으며 노인은 아직도 자기가 이만큼 건강하다는 사실에 일종의 희열 같은 걸 느끼는 것이었다.
한 가지 꺼림직한 것이 있었다. 얇은 뱃가죽이 유난히 깔깔한 것이다.
노인은 그제야 자기가 달포 동안이나 역을 안 감았다는 것을 알고 버럭 구역이 치받치려 하였다.
지금은 비록 갈 데 없는 몸이지만 6순이 지난 작년까지도 귓속에 때꼽재기 하나 안기던 노인인 것이었다.
열흘이 멀다고 물을 데워서 멱을 감고 손톱을 잘랐다.
내일쯤은 별 일이 있더라도 역을 좀 감으리라. 이은 날 아침 노인이 밥상을 가지고 온 여인에게 어째 목욕물 한 바가지만 데어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나무가 귀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런 말씀 드리기가 안 되었지만 몸이 하도 군지로워서 그러니 조금만 데워달라고 하였다.
여인이 생각하는 눈치이자
조금만 디어주시오 하도 급급해서 그려 그시라 나무도 나무지만 여인이 계속 망설이다가 성치않은 몸에 물을 묻히면 덜 좋을 것인디 그여 상처에는 물이 안 가게.
씻으라고 조금만 디어주시오 그렇죠 그럼 누이는 나보다 도리어 몸을 염려해 주는 여인이 고마웠다.
그리고 이날 밤만은 부의 인기척에 신경을 안 쓰고 편히 잘 수가 있었다.
낮에 목욕을 한 데다 방이 따뜻해서였다. 아니면 고루 염려해 주는 여인을 믿는 마음에서인지도 몰랐다.
자고간 딴 신경을 쓰지 않고 일찌감치 잠이 들었다.
밤이 얼마나 깊었을까 노인는 푸득 샘문 긁히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삐드득 삐드득 삐드득 분명 고양이가 아니면 개가 흡이는 발소리일 것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처음부터 이 집에 고양이가 있는 것은 보지 못했다.
문을 허이는 발소도 투박스러운 것이다. 저놈은 걔가 오늘 밤에 낸 일일까 그런데 다시 삐드득 삐드득 삐드덕 노이는 개의 문 허비는 소리가 세상 없이 방정맞게 들렸다.
저놈 개 새끼가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도로 잠을 청하려 하였으나 개의 문 허비는 소리가 좀체 멋지 않는 것이다.
그러자 자기 모른 새 벌떡 일어나 쿵쿵 샘 문을 두들기며 이놈 개 새끼야 자빠지 자거라 순간 개가 허비기를 그만하고 왕왕 달겨들듯 으르렁됐다.
고얀 놈 개 새끼 같으니라고. 그리고 막 누웠던 자리로 돌아오는 때였다.
무에 나무토막 같은 것이 발에 밟혔다고 느끼자 너희는 그만 벌떡 뒤로 나가 둥그러졌다.
쿵 뒤통수가 바람 뼈에 부딪히면서 찡하고 울렸다.
한참 만에 정신이 들었다. 가만히 몸을 일으키고 발치를 더듬어 보았다.
선뜻 손에 잡히는 게 있었다. 민미단 몽둥이 같은 것이었다.
손을 차차 위로 짚어보았다. 밋밋한 몸둥이가 점점 커지더니 문득 머리박이 잡혔다.
순간 노희는 오싹 소름이 끼치는 걸 느끼면서 냉큼 손을 거두고 말았다.
성냥을 그어서 불을 켰다. 여인이 거기에 누워 있는 것이다.
노이는 그제야 들어 알 것 같았다. 개가 문을 허비는 것이며
아침에 지어오던 밥을 저녁에 짓는 까닭도. 그럼 여인도 이제부턴 방에서 자라는가 보군.
노인의 발끝이 여인의 발끝에 뻗쳤다. 그러니까 노인과 정 90도의 각도를 이루고 여인은 머리를 윗목으로 향해 누워 있는 것이다.
빨간 콩기름 불이 쪽빛 이불 위에 미끄럽도록 반들거렸다.
여인의 오른편 머리맡에 물레가 있고 그 옆에 사발 옹베기에는 실 뭉치가 들어 있었다.
여인은 과연 자고 있는 것일까 노인이 이불자락을 턱 아래까지 내리고 가만한 여인을 보았다.
이현을 향하고 누운 여인의 얼굴이 코 위까지 이불에 가려 있었다.
그리고 분명 눈이 감겨 있었다. 하지만 정말 자고 있는 것일까 노인은 이런 생각을 늘 되풀이하다가 훅 입으로 불을 꺼버렸다.
그리고 불과는 반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여인의 감은 눈은 떠질 것이라고 믿었다.
다음 날부터 노인은 여인과 함께 자게 되었다.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저녁 설거지를 하기가 바쁘게 여인이 셋 문을 꼭꼭 걸어 잠갔다.
개가 못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여름 하룻밤 사이에 식구를 잃어버린 여인은 문뜩문뜩 간이 벌렁 거리고 아랫도리가 떨렸다.
자기 모르는 새 손을 가져다 아랫배를 쓰다듬어 보았다.
그때마다 깜짝 소스라치면서 여인은 이 아홉살애들이 눈앞에 아른거리곤 하였다.
꼭 죽고만 싶은 것이다. 그러나 여인은 차마 죽지는 못했다.
도리어 열흘이 지난 뒤에는 논에 나가 김을 매고 피를 뽑았다.
죽은 자식이나 붙들려간 남편에게 참으로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해서 꼭 인역 혼자만 살자는 것 같아. 그러나 그런 미안한 생각 이상으로 논을 매게 하는 것이 있었다.
자기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다가 여인은 문득 아들은 무덤으로 달려가 한나절씩 쓰러져서 흐느끼곤 하였다.
그런 가운데서 이래의 구래 여름 한철이 다가가고 소슬한 가을 바람이 여인의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하는 때였다.
개가 밤마다 방으로 들어오려고 문을 허비적 거렸다.
7회 동안을 이 집에서 살아온 개였다.
이 집에 온 개는 대개들 제명대로 살았다. 12년, 15년 이렇게 해서 살다가 죽은 것이다.
식구가 단출한 탓도 있지만 외딴 곳에서 사는 것이 노상 외롭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평생토록 개만은 사랑해 온 것이다.
언뜻 하면 한 이불 속에서도 재우고 곧잘 한 자리에서 밥을 먹이기도 하였다.
그대로 한 식구인 거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여인은 식구를 잃은 뒤로는 개를 하룻밤도 방에 들이기 들이지 않았다.
그저 낮이면 별을 훑고 키질을 하는 한편 밤에는 무명을 앓다가 그대로 쓰러져 자고 나 있다.
그러던 그 집엔 밤이면 무명을 가깝고 몸이 피곤해도 졸음이 쉬오지 않았다.
밤이 깊어질수록 정신만 한결 맑아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삐드득 삐드득 문을 허비는 개의 발소리가 한갓 시끄럽게만 들리지 않았다.
벌레 울음소리와 함께 한 읍조를 띄고 애련하게 들려오는 것이었다.
한 율조를 띠고 예란하게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러한 어느 날 밤이었다.
여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걔가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개는 방에 들어온 지가 정말 오랜만이라는 듯 천장이며 벽을 르물르물 돌아보다가 예전처럼 등잔 아래로 갔다.
그리고 이내 앞다리에 턱을 괴고 눈을 반나마 가봤다.
개는 허리가 날씬하고 흰 털이 매끈하였다. 게다 몽당한 주둥이 하며 가무스름한 코등이 적이 온순해 보였다.
여인은 어디라 없이 방이 아늑해지는 듯 하였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보다 차차 홍김도 더 했다.
급기야 피로가 탁 풀리면서 온 삭신이 개나른하였다.
그런데도 짜장 졸음은 오지 않았다. 불을 껐다. 개의 숨 쉬는 소리가 간혈프게 들렸다.
문득 자기 아닌 또 한 사람이 방에 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든든하였다. 있던 날 새벽 여인은 잠길에 깜짝 몸을 돌이켰다.
개가 바로 자기 옆에 와 누워 있는 것이다. 희귀하였다.
걔 자신이 옆으로 왔는지 자기가 잠기에 걔를 끌어 왔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깜짝 몸을 돌이킨 여인은 그러나 개를 냉큼 떼밀어내지는 않았다.
잠시 후 손을 뒤로 돌려 가만히 개의 등을 만져 보았다.
자기 체온보다 따뜻했다. 털도 탐스러웠다. 따뜻한 훈김이 손을 타고 차 저 온몸에서 서려 받았다.
여인은 다시 손만 아니라 팔을 온통 갖다 게의 등에 얹어보았다.
좀만에 몸을 개 앞으로 돌이켰다. 개의 배꼽이 마치 자기 배꼽 있는 데 와 닿았다.
여인은 선뜻 하였다. 그런데도 몸을 다시 돌이키지 않았다.
내내 그만큼 가까이 되고 있었다. 그러다 여기는 슬며없이 개를 끌어안았다.
꼭 들어안겼다. 순간 여인은 이상한 충격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자 개를 갖다 저만치 때밀어버렸다. 개가 때밀린 채 앞다리 하나를 두어 번 허부적이다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이날 밤부터 개는 방에서 잘 수 있는 운을 얻은 것이다.
여인이 잠을 깰 때마다 개가 옆에 와 있었다. 자연 손이 개한테로 갔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러다가는 일 나겠다 마침내 여인은 기를 다시 보고 그런데 저고 혼자 잤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었다. 그 전에 개를 데리고 자기 전보다 훨씬 허전한 것이다.
꼭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훈김도 덜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개를 다시 방으로 들일 수도 없었다.
밤마다 남편과 함께 자던 잠자리인 것이다. 노인과 여인은 해저 물기가 바쁘게 문을 걸어 잠갔다.
여인이 등잔을 내려다 심지를 손보고 나서 어디 발 좀 봅시다 노인이 바짓가랑이를 올리고 상처를 끌어 보이자 그새 많이 나기는 나은 것 같소만.
여인은 상처를 똑똑히 들여다 보느라 이마에 잔주름을 지었다.
푸르스름한 상처가 가장 자리만은 이미 딱쟁이가 함을 지면서 가운데는 오히려 빨갛게 피어드는 것 같았다.
차차 살이 차면서 곱이 거치는 탓이리라. 여인은 마저 남은 약을 갖다 바르고 다시 소음을 두툼하게 쌓았다.
그리고 잠시 후 노인이 벗은
핫옷을 뜯기 시작했다. 삼 옷 입은 채 뒹군 노인의 옷은 때가 번벅되어 있었다.
유독 목덜미나 동전 개는 식이로라기마저 까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기는 추잡하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다.
도리어 지난날 개의 냄새를 코에서 몰아내고 사람 냄새라도 흠씻 맡으려는 듯이 옷을 뜯어 말고 연에 코로 가져가곤 하였다.
불을 끄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노인이 등을 여인에게로 돌려대며 옷을 갈아입어서 그런지 훅 훅 쑤신 것 같네.
등 좀 긁어주소. 여인은 차차 말을 낮춰서 하는 노인에게 한결 허물없는 애정을 느끼면서 슬슬 등을 긁자 시원하게 좀 뚝뚝 극소 난 손톱이 없어서 그려 그래도 좀 뜩뜩 극소 바로 그 옆에 좀 극소 조금 에 다 다 시원하다.
당신은 늙었어도 나보다 더 등이 통통해요. 나는 다 늙었지 뭘 그래도 아직은 한 10년은 더 살겄어.
그럼 자네 보기 제 누구 보기여 피 그러자 노이는 여인이 며칠 전인가 자기 남편은 인민군한테 붙들려 갔다고 하던 말이 얼핏 생각나
그럼 자네는 혹 남편이 안 죽고 살아오면 어쩔란가 곧 남편이 돌아오면 자기는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예의는 아무 말 않고 있으니까 나를 더 생각하소 여인이 한참 만에 그럽시다 그러자 노인은 이 여인이 아무리 물어도 자기 남편 붙들려고 곡절을 말하지 않아 대관절 자네 남편 어쩌다가 그랬던가 여인은 차마 그날 밤의 광경을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고 무서운 데다 그 많은 사대들에게 욕을 당한 이야기를 누구한테 할 수 있으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도 자꾸만 이런 곡절을 물으려고 하는 노인이 마땅치 않아 그런데 당신은 몰라 꼭 그런 것을 알라 했었어 자기 운이 나빠서 잡혀갔지 어쩌라고 이렇게 살면서 그런 말 좀 물어보면 모을까 금매 아나 마나 소용없는 말을 뭘라고 물었어아 그럼 당신은 어쩌다가 이런 데까지 쫓겨왔을 뛰어 대잡아 물었다.
당신은 당신의 이야기나 해주고 남의 이야기를 듣든가 말든가 하시오.
자기의 곡제를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것은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집이 불타 버려서 쫓겨왔노라고 했을 뿐 식구들이 불타 죽은 정상이며 그 꼬투리 같은 것은 차마 말하지 못한 것이다.
어쩌면 자기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빛을 볼 수 없는 죄인인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자꾸만 마음을 억누르고 드는 것이었다.
노인이 이곳으로 달려오던 날 마을은 그때까지도 좌익 노래를 부르며 금명간의 남반부가 완전히 떨어지리라는 선전이 찾아가였다.
바로 그날 라지 같이 나서 했다. 쿵 뒤곁에서 총소리가 울리는 거 하자 연놈들이 인민전선에 나와서 함께 붙어 다녀 어느새 누른 복장을 한 빨치산 두 사람이 살인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곧 경찰에 쫓겨가는 빨치산들이 득세와 여당원의 비행을 알고 숙청을 하려는 것이다.
노인이 냉큼 뒷문으로 나왔다. 그리고 자기 모으는 새 처마의 낯을 빼 들었다.
그와 그 동시에 겹방에 있던 득수와 여당원도 역시 겹방 뒷문에 뒤틀로 빠져나왔다.
어느새 빨치산이 뒤뜰로 돌아온 것이다. 쿵 여당원이 직통으로 머리를 맞고 자리에서 숨이 졌다.
저런 순간 노인과 득세는 거의 때를 같이 하여 우를 넘어서 뒷산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따다다다 총소리가 그들을 향하여 연급을 올렸다.
그들은 두 주먹을 부르지고 비탈로만 비탈로만 죽음 하나고 내달았다.
겁안 혼드리나가 있었다. 봉우리께까지 다다른 노인이 문득 고개를 돌려 보았다.
어느새 득쇠가 까마득 저편 봉우리를 넘어 동으로 동으로 내달리는 것이다.
허얀 눈발이 그새 득새를 감춰가고 있었다. 노인이 코 득새 쪽으로 방향을 돌려다 말고 빨리 달아나가라이.
그리고 마을을 내려다 보았다. 어느새 발치산이 둘러싼 마을에서 연기가 두 군데 자욱이 오르고 있었다.
사이사이 불꽃도 솟구쳤다. 얼핏 본 눈에도 분명 자기 집과 이전 구장질을 하던 오선달레 집이었다.
아이고 들 다 죽네. 노인은 봉우리를 넘어서자 한참 동안 정신을 잃고 눈 위에 나가 쓰러졌다.
허얀 눈소이가 노인의 얼굴 위에서 점점이 녹아갔다.
아이고 다 죽네. 노인이 걷어 부러지며 몸을 일으켰다.
한사코 정신만은 안 잃어야겠다. 안 놓아야겠다.
그리고 다시금 고개를 넘고 또 넘어온 곳이 이 여인의 집인 것이었다.
그런 노이는 그날의 광경을 문득 문득 이렇게 떠올려 보았다.
그날 자기 방에는 분명 할 몸과 새 딸년과 아비 없는 손자 놈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할몸은 깨져져야한 무명 치마에 손자 놈을 앉혀놓고 곁둘이를 먹이고 있고, 셋째 딸은 또 마을의 노래를 배우러 간다고 문 앞에서 머리를 빚고 있고 나머지 두 달려는 샘문현에서 실구리를 감고 있다가 급기야 청소리가 울린 순간 할 몸은 할 몸대로 딸들은 딸들대로 다 같이 놀란 눈을 자기에게 보냈던 것이 아닌가.
어찌해야 좋겠냐는 듯 그 초조하고 다급한 눈동자들을 보내던 찰라 가만히들 있거라
그리고 노인은 재빠르게 뒷문으로 나왔던 것이 아닌가.
아 어찌하여 자기는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자기는 나오면서 그대로들 있으라는 말을.
노인은 더욱 그러고 나온 뒤 광경을 그려 보았다. 여당원이 죽고 다시 총소리가 자기 부자를 향해 울리는 찰라 식구들은 총이 방을 향해서 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아들아들 떨고 있었을 것이다.
정말 이젠 죽는가 보다 하고. 그런 순간 빨치산들이 그들을 못 나오게끔 냉큼 물고기를 문고리를 걸었을 것이다.
그리고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렀을 것이다. 삽씨의 불이 웬 처마를 돌아 하늘로 내뿜기 시작했다고 하면 방에 있는 식구들은 얼마나 몸부림을 치며 뛰쳐나오려고 발버둥 그렸을까.
얼마나 가쁜 숨을 헐떡이며 가슴을 치워 뜯었을까.
아버지 문 끌어주시오. 몸에 불이 안 붙기 위해서 치마를 홀로 벗으며 고함쳤을 것이다.
여보 새끼들 다 타 죽어. 노이는 여기까지 환상 그러다가 그만 뜨거운 눈물이 주르 뺨을 적시고 나 있다.
눈물 흐린 눈에 이어서 떠오르는 식구들은 다 죽었을 얼굴들 어느 날 개울가에서 거슬려 죽은 개들 모양 흰 이빨을 드러내놓고 다 죽었을 얼굴들 삐드득 삐드득 삐드득 문뜩 개가 문 허비는 소리에 노인과 여인은 침묵을 깨뜨리고 마주 돌아 누었다.
저놈은 개가 또 그런다. 예 좀 뭐라 하시오. 자네가 나무라서 나는 무서워서 그려 당신이 좀 나무라시오.
나도 막 달라들락하네. 자네가 나무라서 삐드득 삐드득 삐드득 어서 좀 나무라는 말이여.
노인이 일어나 새물 들어기면 내 이 빌어먹을 개 새끼 가만히 자빠이 자가라.
왕 왕 왕 보소. 종일토록 부뚜막에서 죽은 듯이 누워 있던 기회가 날로 달라져 갔다.
조그마한 소리도 번쩍 귀를 세웠다. 그리고 노인이 바깥에 비치기만 하면 좀것 일어서서 달려들듯이 노려보는 것이다.
그런 기회는 또 여인이 북으로 들어올 때도
눈을 서서히 굴리고 앙큼스럽게 돌아보았다. 이전에는 오히려 죽은 시중을 하고 엎드려 있던 개였다.
그리고 어느 개나가 그러는 것처럼 이 게 역시 밥을 줄 때는 꼬리를 재웠다.
그저 엎드린 채 앞발만 세우고 꼬리를 탁탁 치다가 주둥이를 밥그릇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늙은 개는 열기 대신 그만큼 안락만을 꾀하였다. 그러던 게 요즘에는 밥을 줘도 꼬리를 젖는 대신 눈을 표독스럽게 뜨고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여인이 부엌을 나간 다음에야 비로소 주둥이를 밥그릇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나은 밤들면서부터 다시 찬 바람과 눈을 몰아왔다.
살아나온 북풍이 처연이 용두리째를 넘어섰는가 하자 민둥산 마루에 와서 급기야 고개를 붓밟고 어지러히 갈려가는 것이다.
지붕을 넘어가는 바람 소리가 욕마을 거둘 것 같았다.
문풍지 우는 소리에도 마음이 떨렸다. 노인과 여인은 불을 끄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도 바람에 곧 떠날릴 것만 같은 것이다.
곡들을 껴안고 고개를 묻었다. 점점 훈김이 오르기 시작했다.
노인이 슬미이 찬 손을 갖다 여인의 등에 꽂았다. 여인도 손을 갖다 노인의 옆구리에 넣었다.
그리고 바깥 찬바람을 몰아내릴 듯 더욱 바트이 않았다.
순간 두 사람은 아무 걱정도 있고 다만 노인은 여인에게서 여인은 노인에게서 우러 나오는 따사로움에 몸이 풀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힘이라는 걸 아른아른 터득하는 것이었다.
개가 어느새 또 샘 문을 허비기 시작했다. 여인이 곧 이불을 들쑤고 노인의 옆구을 흔들었다.
어서 또 좀 나무라 라는 것이다. 너희이 벌떡 일어나 내 입 빌어먹을 놈 개 새끼 가만히 자빠지 자거라 왕 왕 왕 그리고 다시 삐드득 삐드득 삐드득 삐드득 저놈 개 새끼가 잡빠 잘해도 그리고 노인이 이불 속으로 들어오면 이 저놈 개 새끼 내일 잡아 먹어버리세.
소복도 되고 내 발도 안 빨리 낫겠는가 그라고 저녁마다 저놈 소리 어디 시끄러워서 듣겠는가
여인은 차마 그러자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막상 내쫓으면 조차도 잡아먹을 수야 있으려 하는 것이다.
어이 잡아 먹자 마. 여인은 종네 머리만 파묻고 있으니까 치 자네는 그렇게도 아까운 것이네 그러자 마시.
여인은 갑자기 가슴이 후들거렸다. 개가 죽는 것도 못 볼 일이거니와 노이는 말을 잡아떼기도 다 했다.
그래 잠시 후 떨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주저앉히면서 당신 알아서 하시오.
노인은 그럼 됐다 하였다. 내일 당장 목을 매서 죽이리라.
그리하여 그동안 굶주린 배도 좀 채우고 살도 찌우리라.
그러나 노인은 단순한 영양 보충을 위한 이상의 쾌감이 마음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밤 따라 개가 이상스럽게도 사뭇 오래까지 으르렁거리며 문을 사겨 봤다.
그 바람에 셋문 찍기는 소리가 자르르 하고 들렸다.
너희 또 벌떡 일어나 내일 이 빌어먹을 개 새끼 내 일은 돼지를 탱게 가만히 있거라.
문을 쿵쿵쿵 두드리고 마른 걸레로 찬구멍을 먹었다.
달겨 들듯 울부짓는 소리가 자못 도끼에 차 있다. 여인은 십상 저 개가 저를 잡겠다고 한 말을 알아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였다.
그러자 금세 문을 박차고 들어올 것만 같아 더욱 가슴이 후들거렸다.
다시금 노인에게 가까이 다가붙으며 목을 움츠렸다.
그러나 노인만은 은근한 희망이 가슴 속 가득이 넘치고 있었다.
이튿 양기가 오를쯤에 해서 노인이 과연 개를 잡을 참으로 식칼부터 갈았다.
월감이도 마련했다. 그리고는 개에게 한 사고 다 눈치를 보여서는 안 되니 하고 어이 거구 개 밥 그릇어 밥 좀 푸고 개를 이리 데리고 나오서 어이 여인이 부을 두리번거리며 오매 계가 없구만이라.
순간 노인과 여인의 이상한 직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여인는 십성 개가 어젯밤에 저를 잡겠다고 하던 말을 알아듣고 그새 어디로 달아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오 노인은 혹 여인이 개를 못 잡게 쫓아버리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이었다.
아내까지 잘 좀 보소 아내도 없구만 이라.
노이는 몸소 부엌으로 가서 해서 광이며 사랑채의 디틀까지 돌아가 보았다.
과연 개가 없었다. 그러자 더욱 여인을 의심하면서 대문 밖까지 찾아보았다.
그래도 개는 없는 것이다. 여인 역시 걱정스럽다.
노인이 개를 잡고 안 잡고는 고소하고 7회 동안이나 길러온 기회를 어쩌나 하는 것이다.
더욱 노인이 오기 전에는 밤마다 체온을 함께 나눠 온 기회가 아닌가 그리고 어 저녁에는 차마 노인의 다짐에 못 이겨서 알아서 하라고 했지만 그리고 여인 역시 날로 험하게 지는 기가 무섭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막상 달아났는가 하고 생각하니 급기야 눈시울이 슴벅거려지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왕 죽을 바에 어디로든가 달아난 것이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노인이 밖에서 들어오면 아 저놈은 기가 저기 있네 아산을 가리키며 놀이게한 눈동자에 웃음을 띄고 일명 감격이 였다.
여인이 번쩍 퀴가 뛰었다. 압사를 보았다. 과연 개가 압수한 등성이에 쭈그리고 앉아 이쪽을 건너다 보고 있는 것이다.
여기는 오미
속으로 반가왔다. 그러나 되도록 반가운 기색을 안 나타내려 하며 대체 거가 있소이 아따 그놈은 걔 새끼 눈치가 날쌉네이.
저런 것도 다 제 목숨은 귀한 줄 아는 것 아니여 개가 집에서 저를 도와준 게 용한 듯 이내 고개를 숙이고 딱 냄새를 맡더니 한 다음으로 봉우리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집을 돌아보았는가 하자 이내 고개 너머로 사라진 것이다.
제 놈이 배고프면 아무 때라도 오겠지. 그러나 걔는 밤이 되어도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 날, 그다음 날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역의 산장(독회용)
원작: 오유권 소설 ‘이역의 산장’(현대문학 1960. 6~9)
각색: 공노사노 김병한
등장인물
여인(40대 여자, 집 주인)
노인(60대 남자)
사내(30대 남자)
색시(20대 새댁)
흰둥이(7년생 수캐)
작가(환생 오유권: 전지적 시점에서 작품 노트를 들고 설명하려 드는 주책 없는 노년 나레이터로서, 메타 극적 장치)
안채(안채의 변화를 담당하고 상황을 소개하는 무대 배경 1)
부엌(안채에 붙어 상황에 맞게 변화를 주는 무대 배경 2)
사랑채(안채와 떨어져 상황에 따라 역할이 달라지는 무대 배경 3)
거뭉이(3장에서 잠깐 등장하는 암캐)
그외 경찰 및 인민군과 산사람들(소리로 대체)
득쇠, 연희, 통바지 처녀(대화 중 소개되는 인물)
주요 등장인물 성격
여인: 전쟁으로 아들은 죽고 남편은 인민군에 끌려 갔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남의 일로 생각하지 않는 동정심이 많은 허리가 호릿한 40대 여인. 전쟁통에 살아남기 위해 태극기와 인공기를 항상 품고 있으면서 상황에 대처한다. 농사짓는데 유리하다 싶어 노인 대신 사내를 선택하는 영악함도 있다.
노인: 머슴 둘과 식모 침모를 부리던 62세의 월산리 부농. 1남 3여를 둔 비교적 유복하게 살면서 명심보감 정도 읽어 문자도 섞어 유식한 척한다. 아들(득쇠)이 좌익 활동을 하다 여자 당원과 바람을 피우다 적발되어 도주시킨다. 자신도 도주하다 발에 총을 맞았다. 그 사이 집은 불태워지고 남은 가족은 불타 죽었다. 가족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갖고 산다.
사내: 머슴 출신으로 좌익 활동 중에 입산을 피하려다가 산사람들에게 쫒김.(약혼녀 연희는 사내가 입산한 줄 알고 산사람들 따라 입산함) 여인 집에 은폐용 이중항아리(김치독)에서 피신을 하고 다음날 돌아간다.(3장에서 본격 등장) 나중에 여인의 집으로 다시 피신하면서 나무를 조달해해오는 것으로 여인의 환심을 사 안방을 차지하나, 젊은 색시의 등장에 변심한다.
색시: 25세 새댁으로 지하운동하던 남편이 인공치하에서 떵떵거리던 시절을 불안하게 생각했던 비교적 순리를 아는 활발한 새각시. 남편이 입산한 후 시댁에 혼자 살면서 경찰에 들볶여 친정에 갔으나, 친정은 우익으로 몰려 나간 집이 됐다. 억척스럽게 나무를 하고 노인과 함께 사랑채에 살며 노인의 아이를 잉태한다. 젊은 사내의 꼬임에 넘어가 노인을 여인과 다시 살게하려고 어렵게 말을 꺼낸다.
흰둥이: 7살 수캐로 아들과 남편을 잃은 여인의 충실한 벗(?)이 된다. 잠도 여인과 같이 잔다. 여인을 늘 경계하면서도 추위를 이기기 위한 보온 도우미 역할을 한다. 여인이 노인, 사내와 같이 지내는 데 질투(?)를 하면서 짖어대고 긁어댄다. 노인의 살해 기도에 가출했다가 거뭉이(암캐) 개를 데리고 들어오는 실속을 챙기는 개다.
때
1951년 겨울(1장과 2장)에서 1952년 봄(3장)
장소
영암, 장흥, 강진에 걸친 산(국사봉과 주변 산 어디)
무대
무대는 크게 안채와 사랑채로 나뉘고 안채는 부엌이 붙어있다. 안채는 큰 변화는 없으나 상황에 따라 벽이 나타났다 없어졌다 한다. 부엌은 안채에 붙어 적절하게 변화를 한다. 부엌과 안채는 흰둥이(개)가 항상 지키고 있다. 사랑채는 대문 역할도 하면서 여러 역할을 수행한다.
안채와 부엌 및 사랑채의 소도구와 조명 등은 배경이 되는 연기자가 말로 설명하거나 대자보로 대신한다.
막이 오르면 멀리서 총소리가 들린다. 중년 여인(이하 여인)은 가슴에 태극기와 인공기를 넣었다 뺐다 하면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안채 뒤로 돌아 들어가 항아리에 숨는다.(안채는 항아리가 된다.)
# 제1막
노인(소리만)
사람 살리소오
여인이 머리만 내밀고 귀를 귀울인다. 가슴에 숨긴 인공기를 내어 들고 가만히 발길을 문쪽으로 향한다.
노인(목소리만)
에잇! 고얀놈들!(죽어가는 목소리로)
여인이 문 틈으로 내다보다가 인공기를 감추고, 문을 살며시 연다. 노인은 죽는 시늉을 하면서 살려달라고 신호하고 푹 꼬꾸라진다. 여인은 노인을 사랑채로 끌어들인다. 노인은 질질 끌려 들어간다(배경 사랑채가 끌려들어가는 노인을 거든다)
다시 총소리가 들린다(쿵쿵 쿵쿵 쿵쿵. 땅따르르. 라고 작가가 말한다. 작가는 상황을 설명한다.) 작가 설명은 소설을 기초로 설명하면서 위트를 보탠다.
작가(들고 있는 원고를 깃발처럼 흔들면서)
(원고를 뒤적거리다가, 소설 한 장면을 읽을려다 자기 소개를 한다)
내가 4년 만 있으면 백이여. 25년 전 3월 저승으로 거처를 옮겼는디 고향 사람들이 다시 불러내서 왔어. 보아하니 못난 내 작품으로 연극을 한다, 영화를 만든다 그러는디, 1994년 영화 ‘만무방’ 처럼 만들라면 그만 둬. 제목까지 김유정 선배 단편 이름으로 바꿔가지고 오해가 많단게. 게다가 내용도 내가 의도한 것과는 달라분단께.
각설하고…
(원고를 다시 뒤적거리다가)
이때가 전시여, 여그 사람이면 다 아는 국사봉 아래 조그만 초가에서 생긴 일이여. 쓰다봉께 과장된 것도 많제.
(원고를 읽는다.)
… …
소리만
저 건너 집에 태극기 꽃아라아
여인
(노인의 다친 다리를 포목으로 감싼다) 오메! 많이 다쳤네요.
노인은 반응이 없다. 여인은 이불로 노인을 덮고 주위에 있는 짚덤불을 쌓아 올려 은폐한다.
안채와 부엌 및 사랑채가 무대를 모두 가린다.
인민군(소리만)
이게 뭐야?
노인(소리만)
아야야
여인(소리만)
저의 아부지올시다
인민군(소리만)
늙은 아버지가 왜?
여인(소리만)
방금 날아오는 총알에 발을 상했어라우~
인민군(소리만)
정말?
&사랑채 / 방 안
노인은 이불을 감싸고도 떤다. 여인이 노인의 발뒤꿈치를 본다
여인
(까만 고약 같은 걸 주면서) 남편이 나무 하다가 발 상해… 쓰다 남긴 것이니 붙이쇼. 곰 쓸개로 만든 겅께.
노인
미안하지만 방에 불 좀 때주시오.
여인
금매 말이오. 나무만 있으면 때 드리면 좋겄소만.
노인
이렇게 떨려서
여인
금매 말이오. 나무만 있으면……
작가
이곳은 비교적 산이 험악한 남도지방이지만 나무 사정이 좀 달랐다. 잔디 하나가 없는 순 흙메인 것이다. 어느 쪽이든지 이십리를 나간 곳에 비로소 마을이 있고 나무가 있었다. …(소설의 한 대목을 읽는다)
&사랑채 / 문 앞
노인이 창구멍에 눈을 대고 밖을 내다본다.
여인(일을 하다가, 개를 보고)
춘디 그만 들어가거라이.
개(기지개를 크게 켜고 어슬렁어슬렁 부엌으로 들어간다)
노인(혼잣말로)
거, 자식 하나 있는 것이 꼭 원수로 생겨났던 것이로구나!
작가
상황 설명……
노인(식자라고 자랑하듯이)
무자식상팔자(無子식上八字)라드니 놈이 꼭 원수로 생겨났던 것이로구나!
…
(혼잣말로) 추워서 안 되겄다. 염치 불구하고 울목이라도 잠시 은신해야제.
추위를 견디기 힘들어 노인이 안방으로 건너간다. 하루 한 차례씩이라도 불을 때는 안방은 아무래도 덜 차고 푸근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안방 문을 살그머니 연다. 그리고 손으로 더듬으면서 들어간다.
&안채 / 저녁
노인(방 안을 더듬거리며)
이런!
없네.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노인은 오싹한 느낌을 갖는다. 그리고 서둘러 몸을 돌려 사랑채로 돌아온다. 배경 사랑채가 노인을 가린다.
노인(목소리만)
오메! 뭐이당가?
여우에게 홀린 것 아녀…
& 다음날 아침 / 사랑채 방
여인이 밥상을 들고 들어온다. 노인은 어제밤 일이 궁금해 물어보려 한다. 나레이터가 입방정 떨지 말라고 신호한다. 노인이 말을 참고 밥상을 본다. 시커먼 짠지와…
여인
그새 발은 좀 나으신 게라우?
노인
예, 그저 그만하요.
여인
어째, 약은 자주 갈아붙이지요?
노인
갈아붙이구만이라우.
여인
겨울이라서 그것이 그렇게 쉬 안 낫은 것이요.
노인은 여인이 자꾸 말을 건네는 게 귀찮다. 어서 따순 밥을 떠 넣고 싶은데
여인
참, 난리도 난리도 그렇게 허한 난리는 첨 봤소예.
노인(밥을 한 입 삼키며)
나, 속이 떨려서 근디, 밥 좀 묵고 이야기 합시다.
여인
아니 이불이 저만한디 그렇게 춥습디여. 나는 엊저녁에도 별로 춘지 모르고 잤소예.
순간 노인은 어제 밤 상황이 궁금해 묻고싶다. 나레이터가 입에 손가락을 대서 말 말라고 한다. 노인은 물끄러미 여인의 얼굴을 보다가 뒷태도 살핀다. 혹시 꼬리라도 있나하고
여인의 뺨에서 붙어있던 흰 털 하나가 바람에 떨어진다. 노인이 그것을 의아한 듯이 본다.
& 저녁 / 안채
노인이 다시 안채 문을 열고 더듬거린다… 부엌 샛문이 열려 내다본다. 배경 부엌이 벽을 열고 여인과 흰둥이가 잠자는 모습을 보여준다. 노인은 한편 괘씸하고 얄미우면서도 반갑다(여인이 있다는 사실이). 노인은 사랑채의 이불을 갖고 안채로 옮긴다.(사랑채 배경이 들고 노인에게 건넨다.)
노인(부엌에 귀 기울이며) / 부엌에서 숨소리(효과음)
에잇, 고얀 세상들!
(혼잣말로) 저 놈의 개나 때려 잡아 소복을 했으면…
노인은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안방으로 가 잤다.
# 제2막
& 어느 날 / 낮
안채 등 배경이 무대를 가린 상태로 농짝을 부수는 소리가 들린다. ‘우지직’(효과음)
여인(소리만, 노인 들으라는 듯)
나무는 없고.
혼자 갈래도 왔다갔다 50리 길인디.
이 농짝을 때불면…
남는 것은 바구니 뿐이네…(한숨)
무대가 열린다.
& 사랑채 / 아침
노인
(배를 쓸면서) 멱을 달포나 안 했더니…끕끕해 죽겄네. 행산리에서는 귓속에 때꼽장이도 없었는디.
여인이 밥상을 가지고 들어온다.
노인
말씀 드리기가 쪼깐 미안한디. 몸이 하도 군지러워서 그러니…… 쪼끔만 멱물을 디워줄 수 없을게라우.
여인
……
노인
쪼끄만 디어주시오. 하도 끄끕해서 그요.
여인
글씨라우. 나무도 나무지만……
(조금 생각한다.)
성찮은 몸에 물을 묻히면 덜 졸 것인디 그요.
노인
상처에는 물이 안 가게 씻을라우. 쪼끄만 디어주시오.
여인
그러시요. 그럼.
노인은 나무보다 도리어 몸을 염려해주는 여인이 고맙다.
& 안채 / 저녁
노인이 오랜 만에 잠이 푹 들었다. (부엌에서 푸뜩 샛문 긁히는 소리……) 소리에 노인이 깬다. 계속해서 ‘삐드득 삐드득 삐드득’ 소리가 남.
노인
저놈의 개새끼가!
이놈의 개새끼야, 자빠져 자거라.
개가 허비기를 그만하고, ‘왕왕’ 짖어댄다
노인
고얀 놈의 개새끼 같으니라고!
퍼떡 일어서서 샛문을 두들기고 돌아서는 노인. 나무토막 같은 것에 걸려 넘어질 듯 자기 자리로 온다. 발치를 더듬거린다. 손에 잡히는 것이 있다. 밋밋한 몽둥이 같은 것이 걸린다. 노인은 성냥을 그어 불을 켠다. 여인을 가리고 있던 안방 배경이 열린다.
노인
아하!(사정을 알았다는 듯이)
노인은 자는 여인을 방해하지 않게 발끝은 여인 발 쪽으로, 머리는 여인과 기역자가 되게 눕는다.
노인
(혼잣말로) 워넌히 훈훈하네.
& 안채 / 저녁 다음날과 다음날
다음날도 다음날도 여인과 노인은 안채에서 잤다. 여인은 부엌 샛문 아래를 걸레쪽으로 막는다. 문도 걸어 잠근다. 안채 배경이 벌렸다 오므렸다 하면서 날짜 흐름을 암시한다.
여인
어디 발 좀 봅시다.
노인(바짓 가랑이를 올리고)
그새 많이 낫기는 낳은 것 같소만.
여인은 상처를 보살피고 잠자리에 든다. 노인이 살포시 여인 등 뒤로 손을 올린다. 여인은 조용하다.
안채 배경이 두 남녀를 가린다.
안채 배경이 방 안을 보여준다. 여인과 노인이 기역자가 아닌 나란히 누워 잔다.
&안채 / 밤
노인(등을 여인 쪽으로 돌리며)
옷을 갈아입어서 근지. 쿡쿡 쑤신 것 같네. 등 좀 긁어주소.(말투가 하게체로 바뀜)
여인(노인 등을 긁는다)
……
노인
시원하게 좀 뜩뜩 긁소.
여인
난 손톱이 없어서 그요.
노인
그래도 좀 뜩뜩 긁소.
여인
……
노인
바로 그 옆에 좀 긁소
여인
……
노인
쪼끔 우게.
여인
……
노인
엣다. 엣다 시원하다.
여인
당신은 늙었어도 나보다 더 등이 통통하요잉.
노인
나는 다 늙었제 뭘!
여인
그래도 아직은 한 십 년은 더 살겄소.
노인
그럼 자네 복이제 누구 복이여.
여인
피이.
노인(며칠 전 여인이 말한 남편 얘기가 생각이 나)
그럼 자네는 혹 남편이 안 죽고 살아오면 어쩔란가?
여인
…..
노인
나를 더 생각하소이.
여인(한참 만에)
그럽시다.
노인
대관절 자네 남편은 어쩌다가 그랬단가.
여인
……
여인(묻는 노인이 마땅찮아)
그런데 당신은 뭘라고 꼭 그런 것을 알락해쌌소. 자기 운이 나빠서 잽혀갔제 어째라우.
노인
치이. 이렇게 살면서 그런 말 좀 물어보면 못 쓴가.
여인
금매. 아나마나 소용없는 말을 뭘라고 물어싸라우. 그럼 당신은 어쩌다가 이런 디까지 쫒겨 왔습디여?
노인
……
여인
당신은 당신의 이야기나 해주고 남의 이야기를 듣든가 마든가 하시요.
개가 샛문을 긁는 소리가 요란하다. 삐드득 삐드득(효과음)
여인
저놈의 개가 또 그런다이…… 예, 좀 뭐락 하시요. 예.
노인
자네가 나무라소.
여인
나는 무서워서 그요. 당신이 좀 나무라소.
노인
치이. 나도 막 달라들락 하네. 자네가 나무라소.
빠드득 빠드득(개 긁는 효과음)
여인
어서 좀 나무라란 말이요.
노인이 일어나 샛문을 두들긴다.
노인
내 이 빌어묵을 개새끼. 가만히 자빠져 자거라.
왕왕왕왕(개 짓는 소리)
노인
보소. 거?
여인
……
노인(이불 속으로 들어오며)
워이, 저놈의 개새끼 낼 잡아묵어버리세?
여인
……
노인
소복도 되고, 내 발도 안 빨리 낫겄는가. 그라고 저녁마다 저놈의 소리, 어디 시끄러워서 듣겄는가.
여인
……
노인
워이. 잡아묵자마시.
여인(머리만 파묻고)
……
노인
치이. 자네는 그렇게도 아까운 것이네이.
여인
……
노인
그러자마시.
여인(어쩔 수 없다는 듯이)
(힘 없는 목소리로) 당신 알아서 하시오.
개 짓는 소리와 샛문 긁는 소리가 요란하다.
노인
내 이 빌어묵을 개새끼. 낼은 뒈질 텐께 가만히 있거라.
& 마당 / 아침
노인(부엌을 향해)
워이. 거그 개 밥그릇에 밥 좀 푸고. 개를 이리 데리고 나오소 워이.
여인(부엌에서 소리만)
옴메! 개가 없구만이라우.
노인
(놀래) 응!
안에 까지 잘 좀 보소.
여인
안에도 없구만이라우.
노인
……
노인은 몸소 부엌으로 해서 광이면 뒤뜰까지 찾는다. 개는 없었다.(나레이터 해설)
노인(문 밖을 쳐다보며)
아! 저놈의 개가 저기 있네이.
여인(노인 따라서 밖을 보면서, 안심된다는 듯이)
(반갑지만, 반갑다는 눈치 뵈이지 않게) 대체 거가 있소이.
노인
아따 그놈의 개새끼, 눈치가 날쌉네이.
여인
저런 것도 다 제 목숨은 귀한 줄 아는 것 아니요.
노인
제놈이 배 고프면 아무 때라도 오겠지.
그러나 개는 밤이 되어도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들어오지 않았다.(나레이터)
# 제3막
& 사랑채 / 안과 밖
노인이 외로움 중에 호주머니에서 할멈 이빨을 꺼내보다 헝겊에 다시 싸 담는다.
색시(소리만)
쥔 양반 잠 좀 잡시다아.
젊은 아낙 한 사람이 옆구리에 바구니를 끼고 대문께에 서 있다. 노인은 문을 열고 묻는다.
노인
웬 사람이요?
색시
구걸하러 댕기다 길을 잘못 들어서 이렇게 늦었소.
노인
이 집이 잘 디가 마땅찮은디이……
색시
아무 디서라도 하루밤만 잡시다. 길이 저물어서 그요.
노인
그럼 우선 좀 들어오시오.
색시가 안으로 들어선다. 노인이 곱살한 색시의 얼굴을 보면서 흐뭇해한다.
노인
저녁을 못 대접해서 어쩌께라우.
색시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색시는 저고리 섶을 고쳐 여민다.
색시
이렇게 후한 할아버지를 만나서……
노인
편히 내려 앉으시오. 불을 못 땐 방이어서 춥소.
색시
이만큼이라도 얼마나 감사합니다.
노인
누추하고 찬 방이지만 인가가 없는 곳인께 하룻밤 같이 고생합시다.
색시도 이내 짐작이 갔다. 전쟁 통에 아들, 딸 잃고 혼자 고생하는 노인이거니 하는 생각이. 밤이슬을 피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윗목의 무명솜이며 까만 이불 등속을 찬찬히 둘러본다.
노인
(윗목 젯상의 좁쌀떡을 가리키며) 차고 맛은 없지만 한번 띠어보시오.
색시는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떡은 먹지 않는다. 노인이 색시의 자리를 마련한다.
노인
고단한디 일찍이 누우시요.
노인은 색시가 자리를 보기를 기다려 불을 끈다.
색시
(어두운 잠자리에서) 이렇게 깊은 산 중에 노인 양반 혼자 사시오?
노인
예. 나 혼자 살고 있소.
색시
식구들은 다 어쩌시고 혼자 살고 계시오?
노인
……
색시
사변통에 어찌 되었소.
노인
예. 사변통에 이렇게 혼자 몸이 되었소.
…
나도 실은 이 집의 주인이 아니요. 우리 집은 저어 행산리란 디가 있는디 다 불타버려서 이렇게 피해 와 있소.
색시
그럼 이 집에 또 사람이 살고 있소?
노인
예. 안채에서 이 집 여인이 나처럼 피해 온 남자 한 사람하고 같이 살고 있소.
노인은 이야기에 굶주렸던 참이라 차근차근 , 자기의 처지를 얼추 말한다.(나레이터 소설 한 대목을 소개)
1장에서 생략했지만 노인이 피해 사랑채에 든 날 젊은 사내도 한 사람 피신 했었다. 여인은 자기가 숨어 지내던 은폐된 항아리에 사내를 숨겼다. 그 사내는 이튿날 여인에게 고맙다고 떠났다. 그런 사내가 다시 여인의 집에 피해 왔다. 처음에는 사랑채에 묵다가, 나무를 해오면서 힘없는 노인을 밀어내고 안방을 차지했다.(노인은 열심히 설명하고 색시는 듣는 시늉을 한다.)
색시(노인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노인 양반이 추위에 고생이십니다. 그런디 이런 깊은 골짜기에도 집이 있소잉.
노인
순 무법한 골짝이요.
색시
그럼 이런 난리통에는 역시 이런 디가 피신은 할 만하겄소.
노인
그래 이렇게들 와서 힘을 가지고 사는 판들 아니요.
색시
그나저나 안방 남자가 참. 무지한 사람이요잉. 자기가 안방을 뺏았으면 이 방에 불이라도 좀 때 드릴 일이제.
노인
무법한 산골짝이라 하는 수 있소.
색시
그럼 여기는 이때껏 경찰 한 사람도 안 지내갔소?
노인
경찰은 커녕, 사람 한 사람 지나가는 것을 못 봤소. 나무만 있으면 피신처로서는 쓸 만한 곳 아니요.
색시
그럼 이 집에 양식은 묵을 만큼 있다우?
노인
양식은 웬만큼 여유가 있는 개비요.
색시
그럼 이 집 여인은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고 마음만 선하제, 주책은 없는 여자구만요잉? 여자가 중심이 있어야제.(자기는 안방 여자와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듯이)
노인
하도 산골에서만 오래 산 여자라 놔서 그런 모양입디다.
색시
그래라우잉.
노인
그런디 젊은댁은 오늘 어디로 가다가 이렇게 길이 저물었소?
색시
저도 실은 인공 때 식구를 잃고 이렇게 혼자 돌아댕기요.
노인
그래도 젊은댁은 그저 돌아댕기는 사람은 안 같는디라우.
색시
해도, 정처없이 돌아댕긴께 얻어묵으러 댕기는 사람이나 별다름 있소.
노인
그럼 젊은댁은 어쩌다 식구를 잃었소?
색시
…..
노인
인공 때 무슨 일을 해겠습디여?
색시
노인 양반 그런 이야기는 그만해둡시다.
…
그럼 노인 양반네는 좌익으로 몰렸습디여?
노인
그런께 우리는 어느 쪽으로 몰렸다고는 말할 수 없지라우. 자식 놈이 좌익을 하다가 그 좌익들에게 폐를 봤은께.
색시
내것 주고 뺨 맞는다더니 꼭 그 쪼요잉.
노인
이루 말할 수 있소.
색시
그래도 다 시국 탓이지. 이런 사람들이야 뭐 잘못이랄 것 있소.
색시는 비로소 자기의 정체를 이렇게 밝힌다.(나레이터 소설 대목을 읽는다.)
& 이튿날 / 사랑채
색시(갈 채비를 꾸리고)
노인 양반이 추위에 고생하시겄소. 그럼 평안히 계십시오. 내가 어쩌면 노인 양반을 한 번이나 더 만나게 될란지 모르겄소.
노인은 가는 색시를 배웅한다.
& 안채
여인이 물을 데워가지고 들어온다.
사내
어째. 개는 요새 어디 안 나가든가?
여인
안 나갑디다. 한 댓새 전에 나갔다 오고는.
사내
그럼 요새는 전 같은 꿩도 못 줏고 한께 저 암캐나 잡아묵제?
여인
더 조금 놔둡시다. 수캐 혼자서 심심해서 쓸 것이요. 그라고 혹 제 짝을 잡게 되면 수캐가 가만히 안 있을 것이요. 막 물라고 덤빌 것이요예.
사내
그래도 뭐 잡아묵제. 개가 설마 사람을 잡을라든가.
여인
그래도 봄까지나 더 기르고 봅시다. 수캐도 혼자서 있는 것이 심심해서 거뭉이를 데리고 왔는디 그렇게 해서 쓸 것이요.
사내
그럼 더 쪼끔 뒀다가 잡으까……
부엌의 수캐가 방을 향해 사납게 짖는다. 사내가 숟가락을 멈추고 여인을 바라본다.
여인
보시오 거. 저 개가 아주 눈치가 빠르다 말이요. 방금 한 말을 알아듣고 저렇게 짖어라우.
사내
지랄…… 그래도 제가 비수 한번 들어가면 꼼짝 못하제.(가슴에 숨긴 비수를 만져본다.)
여인
거기다 또 두 개의 사이가 이만저만 아닌디. 아무 놈이라도 한 마리가 죽으면 남은 놈이 가만히 안 있을 것이요.
사내
그나저나 날이 좀 풀리면 잡제.
여인
……
사내
꼭 잡아잉.
사내가 거듭 이렇게 다지고 밥상을 물린다.
사내
인자 참 나무도 못해 묵겄어!
여인
고생스럽지만 늦은 봄까지만 어떻게 좀 살아갑시다. 새보리만 나면 나무는 걱정 없을 것이요.
사내
참!
여인
하는 수 있소. 이런 산골로들 오신 것도 다 인연인 것 아니요.
사내
그래도 웬만큼 힘이 들어야제.
…
이제 노인을 내보내세. 몸이 고단해서 노인네꺼까지 못하겄당께.
여인
……
& 다음 날 / 사랑채
사내가 문간에서 건방진 태도로 사랑채 노인에게 말을 건다.
사내
이젠 추위도 거반 갔으께 노인 양반 다른 디로 좀 나가시요. 원체 나무하기가 사나워서 그요.
노인(맥 없이)
내가 가기는 어디로 가라우.
사내
그래도 나무가 없는디 하는 수 있소. 나도 인자 더 이상 나무를 못하러 댕기겄소.
노인
절후는 봄이지만 아직도 추위가 두 달, 석 달이나 안 남았소. 이왕 힘입는 김에 쪼끄만 더 입읍시다. 갈 디가 없어서 그요.
사내
그러드래도 어디로든지 좀 나가시요. 안 나가면 인자 밥을 못 드리게 될 것이요.
사내가 돌아가자 노인은 죽을 쌍을 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나레이터: 노인의 속 사정을 소설 내용으로 소개한다.)
& 사랑채 / 밖 / 밤
문 흔드는 소리가 들린다.
노인(누가 들을까봐 겁내며, 나직히)
뉘?
색시
노인 양반, 저요. 그새 주무시요.
노인이 문고리를 젖혀준다
노인
아니!
색시
예. 나 또 왔소예.
색시가 짐을 싸고 이고 문 앞에 섰다.
노인(반갑게, 그러나 작은 목소리로)
어서 오시오.
색시
예. 나 노인 양반한테 신세 좀 질라고 이렇게 또 왔소.
& 사랑채 / 안
색시 윗 작업복을 벗는다. 노인은 물끄러미 색시를 바라본다.
색시(한숨을 쉬면서)
어째 그 사이라도 편히 계셨소?
노인
예. 잘 있었소. 젊은댁도 무고하시요?
색시
예. 나는 무고하나마나 하마터면 큰일 날 걸 이렇게 왔소.
노인
그나저나 반갑소.
색시
저도 참 감사하구만이라우.
색시가 윗목의 무명송이 까만 이불 등속을 돌아보다가 으스스 몸을 떤다
노인
발 넣시요.(이불을 젖혀 주며)
그정. 지금 밤이 얼마나 되었소?
색시
이제 한 여덟. 아홉 시밖에 안 됐구만이라우. 내가 막 땅검이 드는 것을 보고 집을 나섰은께.
……(한숨을 돌리고)
내가 그날 밤 여기서 자고 가지 안 했소잉…… 그래 그날 막 집으로 돌아간께 그새 또 순경들이 나를 찾아왔어라우. 그리고는 나보고 산으로 연락 갔다 온 것이 아니냐고 그냥 지서로 데리고 갑디다. 그러더니 또 막 장작개비로 내리치지 않소. 등이건 다리건 머릿박이건 할 것 없이 마구 내리치면서 어디로 가서 무슨 연락을 취했느냐고 한디. 내가 어쩔 것이요. 그래 막 뛰고 소리를 치면서 나는 친정에 밖에 안 댕게왔다고 해도 그래도 막무가내로 치드란 말이요. 아따아! 얼마나 아플 것이요. 그래 정신을 잃고 자빠지니까 구류간에다 처넣다가 사흘 만에사 내주지 않소. (한숨을 쉬고) 그러면서 또 기어이 저 사람(남편)을 안 찾아가지고 오면 이젠 경찰서에다 넘길 것이니 그리 알라고 하지 않소. 그러니, 자. …… 내가 저 사람의 간 곳을 알것소오. 또 설혹 간 곳을 안다드래도 찾아다주겄소? 그래 무서워서 더 있지 못하고 마침 노인 계신 곳이 생각나서 이렇게 왔소예.
노인(머리를 까닥이며)
……
색시
그래, 접때 들은 말도 있고 해서 우선 내 옷벌하고 쌀하고 또 장작을 여나무 개피하고 가지고 왔소예. 어째 같이 있을 수 있으께라우?
노인(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죽을 약 곁에 살 약이 있다고 않습디여.(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색시에게 하는 말인지. 애매하게)
나레이터: 애동색시는 때로는 아버지를 받들 듯이 또 때로는 남편을 섬기듯이(소설의 내용을 읽어준다.) 활발한 애동색시 덕분에 한 두달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소개한다.
(소개하는 동안 소리는 들리지 않고, 네 사람이 즐겁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 안채
사내
참 사랑방의 여자가 보통내기가 아니여. 오늘도 나는 나무를 한 뿌리 패는디 그 여자는 막 두 뿌리 세 뿌리까지 패.
여인(뾰루퉁한 표정으로)
아 그럼. 그 여자하고 같이 사씨요. 응? 당신은 젊은께 그 여자하고 살어.(목소리를 높힌다.)
사내
참, 손놀림도 다기지고.
여인
아 그런께 잔소리 말고 그 여자하고 살란 말이요. 그럼 나무도 안 하러 댕기고 안 편하것소.(찬 바람이 인다.)
사내
그럼 말은 바로 말이제. 늙은 사람께 댈까.
여인이 눈물을 종종이 흘린다.
나레이터: 여인이 젊은 사내를 선택한 이유를 소설 대목을 인용하여 소개.
& 사랑채 / 안과 밖
여인
정말 인자 날도 따뜻해지고 했은께 그 여자랑 데리고 가치 나가시요예.
노인
우리가 첨부터 갈 곳이 있었으면 이런 디로 왔을 것인가. 아주 있는 김에 더 쪼끔 있세.
여인
노인 양반만 같으면 얼마든지 있어도 괜찮으라우. 그렇지만 그 여자 땜에…
노인
아. 그 여자가 어쨌단가?
여인
어쩌나마나 그런 눈치도 없소원.(어이 없디는 듯)
노인
왜?
여인
아, 거 보면 모르겄습디여? 안방의 남자가 늘 눈짓하는 것 보시요.
노인
치이, 그래도 걱정 없어. 다들 이녁 중심이 있은께. 중심이.(여인을 비웃듯 ‘중심'을 강조)
여인
어따어따! 그러다 혹 두 젊은 것들이 눈이 맞아 가지고 나가버리거나 또 저이들이 나무를 해 나른다고 늙은 우리를 쫓아내면 어쩔라우?
노인
아. 그래도 이녁 중심이 있은께 괜찮단께.
여인
어따어따! 힘 하나도 없는 노인이.
노인
아, 그러면 또 우리 둘이 살제 어째.(노인이 웃는다.)
여인
당신은 소용 없어라우. 당신이 뭐 나무 하나를 할지 아요? 농사 한 마지기를 질 힘이 있오.
노인
그래도 자네 혼자 사는 것보다는 낫제 어째.
여인
나나마나 늙은 노인도 나하고 사는 것보다 젊은 사람하고 사는 것이 더 낫을 텐께 어서 나가란 말이요.
노인
어쨌든 자네하고는 틀려서. 다들 이녁 중심이 있은께 걱정 마. 그라고 자네는 아무리 남자가 그런다고 이 방에 양식마저 안 주는가. 에잇 사람 같으니라고! 아무리 갈려서 살지만 사람의 정리가 그럴 수가 있단가.
여인
정리고 뭣이고 오늘이라도 당장 나가란 말이요. 양식은 절대 안 줄 텐께(표독스럽게)
노인이 말이 없자, 여인은 발밑에 와 있는 두 개를 쓰다듬는다.
여인
참 우리 개들 이이쁘다. 엣다. 참, 순하고 이이쁘다.
여인
이런 개들도 한번 의가 맞어논께 이렇게 안 나가고 같이 살어라우잉. 그런디 이 거뭉이는 어디서 온 갠지 갈 지도 모르고 이렇게 오래까지 사는지 모르겄소. 어쨌든 저의 집보다 여가 다 존께 이렇게 안 갈 테지라우.
노인
그럼. 그런 개도 한번 의가 맞으면 그렇게들 같이 사는디 자네는 왜 사람이 되어가지고 이 남자한테도 흥, 저 남자한테도 흥. 하는가.(전에 색시가 사용했던 표현을 인용)
여인
그런께 사람이 영리하다우. 늙은 당신하고 평생을 같이 살면 뭣할 것이요.
노인
그래도 사람은 마음을 지키는 것이 사람이여.
여인
사람이나마나 그 통에 당신은 차라리 더 안 잘 되었소. 가만히 있어도 나무해다 밥 지어주고, 옷 빨아주고, 백날 묵고 땡 아니요. ‘묵고 땡!’
노인
……
여인(혼잣말 처럼)
엣다. 우리 개들 이이쁘다.
여인
그런디 노인 양반. 또 안방의 남자가 이 암캐를 잡아묵자고 해싸드란 말이요. 진작부터 졸라싼 걸 이때까지 막아왔소예.
노인
아. 잡어. 그럼 덕분에 개장국이나 한그릇 얻어묵께.
여인
당신들은 그렇게 괴기 묵는 것밖에 모르요. 당신은 그 전에 또 수캐를 잡자고 하더니…
노인
……
여인
인자 제 짝들이 있은께 절대 못 잡어라우.
여인은 부엌으로 돌아간다. 개도 여인 따라 간다.
& 안방 / 저녁
사내
자네는 사랑방의 노인을 안 생각하는가?
여인
……
사내
뭣하면 둘이 또 안방에서 살제. 내가 사랑으로 가께.
여인
(돌아 누우며) 알량한 소리 마시요.
사내
아. 그렇게 말할 것이 없어. 서로 상의대로 하자는 것이제.
여인
몰라요 몰라. 나는 몰라.
& 사랑채(나무하고 돌아오는 색시를 보는 노인)
노인
오소. 이리. 따순 디로 앉소.(저녁을 차릴 준비를 하며)
색시
놔두시오. 내가 갖다 묵을라우.
색시가 밥상을 가지고 온다.
색시
뭐라고 꼭 나 오도록까지 기다리고 계시오. 밥도 식고 한디. 먼저 자시제.
노인
별로 시장한 줄 모르겄네.
색시
어째, 양식은 얼마나 남았습디여.
노인
한 닷새 남짓 목제맨.
색시(한숨을 쉬며)
그럼 양식 땜에 큰 탈이요.
노인
그래 오늘도 안방 여편네보고 양식을 주란께 결코 안주겄다고 하드란 말이.
색시
탈이요. 거.
노인
왜 밥을 그렇게밖에 안 묵는가. 더 뜨소.
색시
별로 염이 없구만이라우.
노인
나무까지 해 갖고 와서 배 고프겄구만 더 좀 뜨소.
색시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염이 없구만이라우.(목소리가 줄어든다.)
색시가 맥없이 등잔불만 보고 있다.(근심어린 표정으로)
노인
왜 오늘 안 존 일이 있었던가?
색시
아니라우.
노인
왜 그러 밥도 쪼끔밖에 안 묵고 그렇게 앉었는가?
색시
……
나레이터: 그사이 색시는 이중삼중의 괴로움에 빠졌다.
배경이 사랑채와 안채를 가린다.나뭇간에서 오간 대화가 소개된다.
& 막이 가려진 상태로 소리만(사내와 색시가 나무간에서 나눈 대화)
사내
둘이 합의만 되면 양식은 절로 문제없이 풀릴 것이요. 노인 걱정도 할 것 없고.
색시
어떻게 해서라우.
사내
우리가 없으면 나무 때문에 밥을 못 지어 묵을 것 아니요. 우리 둘이 합이 맞으면 노인은 안방으로 갈 것 아니요.
색시
아무리 늙은 사람이라고 그렇게 만만히 보아서 쓴다우.
& 무대
나레이터 등장: 그간의 사정 설명(사내와 색시도 대화하는 모습으로 등장
사내
(젊은 우리가 모신다는 얘기를 구구이 하는 모습, 말하는 모습만 보이고 나레이터가 괘도를 들고 프레젠테이션을 한다.)
프레젠테이션: 그림을 그려 소개. 노인과 여인은 부모, 사내와 색시 그들의 자식.
색시
…… 그렇다면?
그럼 생각해 봅시다.
사내
그럼 사랑에 양식도 없고 한디 되도록 빨리 안방으로 보내시오.
색시
……
다시 배경이 닫혔다 열린다.
&사랑채(색시가 맥없이 등잔불만 보면서)
색시(어렵게 말을 꺼낸다.)
한 가지 말씀 드릴 것이 있는디…
노인(나직이)
무슨 말인가? 해 보소.
색시
아무래도 우리가 따로 지내야만 안 굶구 살겄는디… 이렇게 하시면 어떻게라우?
노인
……
색시
저를 그릇다고 하실란지 모르겄소만. 차라리 그렇게 하시는 것이 더 안 낫겄소? 서로 살기 위해서 말이요.
노인
……
색시
생각대로 말씀해보시요. 부당하시다 하면 내가 이곳을 뜨든가 할라우.
노인
……
색시
말씀해보시요. 나는 말씀하신 대로 순종할랍니다.
노인
사정이 그렇다면 별 수 있는가. 내가 안방으로 가제.
색시
참, 두루 말할 수가 없구만이라우.(울적해 한다.)
노인
그렇게 생각 마소. 다같이 시국을 못 만난 탓 아닌가. 어쨌든 자네는 내 은인일세. 섭섭이 생각 말고 같이 사소.
색시
내가 친정만 무사했어도 이렇게까지는 안 하고 살 텐데…
노인
틀림없이 그렇게 위할란지 모르겠네? 그전처럼 쫓아내지 않고.
색시
내가 있는디 그렇게 될 것이요. 정성껏 모시도록 할 것이니 염려 마시오.
노인
그런디 안방의 여인이 승낙할란지 모르겄네.
색시
그이한테는 집이가 잘 좀 말하시오. 안방의 남자도 이야기하겄지만… 그이도 젊은 우리들이 받들고 섬긴다면 뭘라고 꼭 젊은 남자하고만 살라고 할랍디여…
나레이터: 마침내 이틀 만에 안방의 여인은 세 사람 의견에 찬동했다. 네 사람이 목숨을 살린 아내가 되고 남편이 됐다가, 힘과 나이에 따라 부모와 자식 간이 된 셈이다.
& 막이 닫히고 소리만
사내(기분 좋게)
이노무 나무야 어서 넘어가거라. 빨리 가서 개 잡을란다.
…
통바지 처녀
예말이요 예
사내
오메!
통바지 처녀
옥바우 양반. 나 좀 만납시다예.
사내
……
통바지 처녀
실은 연희의 부탁이 있어 날마다 와서 기다렸소.
사내
예. 나 대강 짐작은 했소.
통바지 처녀
그래서 옥바우 양반을 데리러 이렇게 기다렸소.
사내
그래 지금 연희는 어디 있소?
통바지 처녀
낭이산에서 지리산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소.
& 목소리만 메아리지면서
사내
그럼 지금 낭이산에 십여 명이 있다고 하였지요?
통바지 처녀
열두명이 있습니다.
사내
그럼 당신의 직책은 뭐요?
통바지 처녀
임시 조책을 보고 있소. 제 위로 위원장 동무만 있소.
사내
그럼 내가 산으로 들어가는 대신 당신이 연희를 데리고 나올 수는 없소? 아주 말이오.
통바지 처녀
……
사내
내가 산으로 들어가는 대신 당신들이 나오시요.